냇가이야기/젖줄일기

9월 9일 강경에 갔었습니다. 그리고 금강의 오강 팔정을 이야기해봅니다.

잉화달 2009. 9. 9. 21:32

 

 강경으로 떠나기 전 아이들의 초등학교 인근의 흙벽집앞에 장미꽃이 피어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높아서 였는지 봉투를 씌우지 못한 배 두개가 카메라에 포즈를 취해주었습니다.

자고로 배는 해를 보며 저렇게 진한 청노란색으로 커야합니다. 

껍질이 두툼하니..  상품성도 떨어지고 하겠지만.. ㅎㅎ

 강경에서 본 한옥 교회입니다.   기독교 전파 초창기의 교회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데요,

들어가는 초입의 출입문 부터 여자들의 문과 남자들의 문이 다릅니다.   보이는 왼쪽의문이 아녀자들이 들락이는 문이라고 합니다.    언제 시간이 되면 내부의 모습과 함께 자세하게 당시의 교회당의 풍경을 묘사해드리겠습니다.   

 

   남,녀가 서로 유별한 풍습때문에 빚어진 여러가지의 재미있는 건축양식은 여러곳에서 나타납니다. 동대문구 회기동의 모 교단의 날개달린 교회, 각 지역의 성당과 교회뿐 아니라 제가 어렸을적까지도 교회는 남자석과 여자석이 달랐습니다.   마루바닥에 방석을 깔아도 남자의 줄과 여자의 줄이 달랐습니다.

가운데는 커튼이나 나무막으로 가려진 형태가 최근 70년대까지도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무척 할 말이 많으므로, 기독교와 기존의 유교적 전통과의 충돌과 절충, 일제와 신사참배 그리고 기독교의 생존전략, 6.25이전 평양선교 - 기독교의 유교화와 훈장선생님표 기독교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 해야합니다.

 

또한  그에 식상한 대중적 기독교로서의 샤머니즘과의 결탁이 불러온 최근의 유행병 같은 신유(병고침)와 방언 위주의 교회 /  독립채산제로 인해 자본주의논리로 점철되어버린 돈놓고 돈먹기 교회의 타락과 세습, 그리고 탈세에 대한 비판.

 

 반공사상이 가져다 준 유교와 유림의 인공호흡기로서의 기독교, 대한민국의 튼튼수구와 기독교의 결합등등 대해 덜 바빠지는 2년 후 쯤엔 따로 시간을 내어 자세하게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곳은 옥녀봉이라는 강경 최고의 금강조망을 자랑하는 언덕 수준의 산의 중턱에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침례교회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비어있는 쓰레트집인데 조만간 교단측에서 원래의 초가집과 작은 교회 한개를 세우는 복원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바다와 가까운 항,포구의 근처에는 기독교가 일찌기 전파되어 일반적인 동네보다 훨씬 더 기독교의 교세가 센 편입니다.   사람들도 개방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선시대부터 대한민국의 대표 포구 중 하나인 강경포구에 이렇듯 역사적이고 기념비적인 종교시설이 많다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옥녀봉 정상 바로 아래에 위치한 할머니께서 운영하시는 주막 겸 슈퍼입니다.

2000원짜리 막걸리를 시키면 쟁반에 오이랑 그때 그때 밭의 푸성귀에 고추장 간장 등 함께 내어주신답니다. 

2000원의 행복입니다.  집 뒷쪽에 가면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감나무 그늘에 평상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시원한 그늘에서 **식혜를 먹었습니다.

 

200년 넘은 정자나무 아래로 봉수대가 복원 되어 있는 정상 부분에 오르면...

 

 슈퍼마켓과 밑동이 모두 썩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오래된 정자나무가 보이고,

 

 북서쪽을 바라보면 금강의 지류가운데 가장 큰 논산천과 금강이 만나는 부분이 보입니다.

 

상류쪽으로 부여-청양-공주를 거처 내륙의 부강나루까지 이어지는 뱃길이 상상되는 금강이 이어집니다.

연기의 부강나루까지 50여개가 넘는 나루가 2Km 이내의 간격으로 시내버스정류장 처럼 강의 양안에 존재했었습니다.   그리고 평균 십오리 간격으로 정자가 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오강 팔정으로 금강의 다섯개의 이름과 여덟개의 정자를 이야기 합니다. 

오강에는 상류로 부터 오강(吳江-연기천), 초강(楚江-부강나루 인근의 강), 금강(錦江-곰강이라 불리기도 하며 공주,청양의 강), 백강(白江-천정대에서 부여까지), 청강(靑江-논산/익산/군산/서천의 강 하류)으로 이견없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8정을 꼽으라 하면 지역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공주쪽에서는 독락정(獨樂亭,연기나성리), 금벽정(錦壁亭,장기금암리), 벽허정(碧虛亭,공주소학동), 사송정(四松亭,공주월송동), 쌍수정(雙樹亭,공산성), 안무정(按舞亭,공주정지산), 원산정(圓山亭,탄천유하리), 한림정(翰林亭,영곡리)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청양 부여 쪽 에서는 수북정(水北亭,규암), 백화정(百花亭,낙화암), 몽뢰정(夢賚亭,왕진나루), 원산정(圓山亭,탄천), 일사정(一沙亭,청남),독락정(獨樂亭,연기), 사송정(四松亭,공주), 금벽정(錦壁亭,장기)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연기쪽에서는 탁금정(금벽정의 다른이름)(濯錦亭), 합강정(合江亭), 청풍정(淸風亭),을 포함시켜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 지역에 따라 8정을 부르는 이름이 달랐고, 이 외에도 8정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를 여덟에 꼭 넣어야 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이 정자와 누각의 중요성은 단순한 경관 뿐 아니라 조망이 좋아, 군사적인 목적에서의 이용도 가능했습니다.

당연히 강을 거슬러 오르내리는 배들에게 일종의 거리계와 같은 역할도 했겠죠?

조선시대 평양(대동강)과 대구(낙동강)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시장의 하나였던 강경포에서 출발한 상선들이 여러 물건을 싣고 금강을 따라 올라간 마지막 종점은 연기의 부강나루입니다.

이 곳에서 충남과 충북의 내륙지방에 해산물과 소금을 쌀과 땔감과 내륙의 산물들로 교환하는 가장 큰 물류 교류의 장이 펼쳐지는데, 이 곳까지 이르는 각 지역의 정자들을 지날 때 마다 인근의 지방관(고을의 원님)들에게 통행세를 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일제때까지도 그 모습을 거의 간직했던 금강의 하류는 특히나 대청댐과 둑방의 신설로  변했고, 또한 4대강 살리기?라는 명목으로 엄청나게 다시 변화해야 합니다. 

더 이상 변하기 전에 우리는 새로 난 도로와 둑방길을 배제하는 상상력을 발휘해, 하얀 백사장 위로 햇살을 받고 내륙의 동쪽을 향해 어물과 새우젓을 가득 싣고 강을 역류하는 황포돗배와 강경포의 번성을 상상해야 합니다.

 

옥녀봉에서 바라본 강경의 시가지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구시가지쪽에 가면 옛 일본식 적산가옥부터 한국의 근현대사의 굵직한 현장의 족적들이 남아있는 건물들이 매우 많이 있습니다.  

 

 업무때문에 찾아간 강경이기에 많이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멀리 보이기만 하는 팔괘정의 모습을 보며, 김장생과 송시열의 사제간..  그리고 이중환의 택리지, 가장 최근의 ??? 시인을 떠 올립니다.    ???시인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ㅠ.ㅠ

그리고 회의를 통해 여러가지의 숙제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