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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환 마마, 그리고 호식총과 목화밭이야기.

잉화달 2020. 12. 5. 07:39

호환과 마마 중 더 무서운 호환이니 앞에 썼겠죠?

사실 호환과 마마는 그 연관관계가 매우 깊습니다.

호환의 피해가 크면 마마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마마가 크면 호환이 적어지는 비례관계였다고나 할까요?

이 바위 위에서 호랑이가 앉아 숨어 있다가 큰 고개이니(토산령) 지나는 사람들을 덮치는 방식으로 사냥(--;;)을 했다고 한다.

필자는 2006년과 2016에 호랑이와 관련한 조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목적은 달랐지만 대체로 호랑이에 대한 피해와 호랑이에 대한 경외심등이 나타나는 다양한 문화유산들 그리고 호식총이라는 경북에서 강원도로 이어지는 지역의 백두대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호환피해자들의 무덤 중 몇군데를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돌로 쌓은 다양한 호식총 중에는 엎어놓은 시루에 물레 가락의 쇠꼬챙이부터 쌍둥이 중 하나가 호환 피해를 보았을 때 활용하는 절굿대, 그리고 가르마를 탄 아이의 무덤까지 이야기와 소식으로 전하는 호식총과 관련한 다양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경북 춘양의 백두대간수목원에 전형적인 호식총의 모형을 조성해 놓았다.

왜 이리 많은 호랑이가 있었나요? -

송나라의 사신이 쓴 기행문인 고려도경에 나오는 고려시대의 상황 이야기를 보면 송악일대 약간의 빼고는

대부분의 마을과 들판이 숲에 둘러 쌓여 있는 우거진 한반도를 이야기 합니다. 

 

이후 목화의 보급이 가져온 다양한 산림의 개간  목화재배.

이 시기는 새로운 작물로 목화가 들어왔고 생활 전반에서 목화가 가져오는 영향력이 엄청났습니다. 

기존의 작물을 재배하는 곳에 목화를 키울 수는 없으니 부가적으로 목화밭을 따로 개간해야 했구요.

이런 의생활의 변화로 인한 목화밭의 확대는 결국 숲을 개간하는 효과를 냅니다.

이 숲의 개간은 호랑이퇴치가 붐을 이루던 이 시기에 상호관계를 통해 숲을 없애는데 가속효과를 가져옵니다 

급격하게 숲이 줄고 농토를 늘리는 효과를 내었다는 겁니다.

실제 백두대간수목원에서 한국호랑이를 볼 수 있는데, 그 덩치에 압도당한다.  정말 집채만하다. 

호랑이 퇴치가 붐을 이뤄요?   네..  바로 착호갑사입니다. 

조선초기에는 착호갑사의 양성도 조직적으로 이뤄졌는데요.

조선초기 2천명에서 성종3 99백명 성종5 14800명까지 있었다고 하죠? 

현상금도 붙어요.  호랑이가죽의 시장 가격을 높이쳐주게 만들어 일종의 현상금의 효과가 나오도록 만들었었죠.

그래서 농사짓는 양민들이 겨울철이 되면 수렵의 철이 되어 모두가 호랑이 사냥꾼으로 변신하게 되니...

호랑이가 버텨날 재간이 없었을 겁니다. 

겨울철에는 눈이 내리니 발자욱의 추적도 가능하고, 낙엽이 지니 숲이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 호랑이를 사냥하는 것이죠.

결국 조선 전기 일백여년간의 호랑이 사냥으로 조선에서 호랑이의 숫자가 급격히 줄었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에 사람들은 들판에서 마음껏 농사짓고 채집과 수렵을 할 수 있었죠.

 

그럼 이제 더 이상 호랑이가 없는 들판이 생겼으니 당연히 이 초지에 맘 놓고 짐승들을 키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드 넓은 초지에 마음껏 소나 말, 염소와 닭 따위들을 풀어 풀을 띁길 수 있었겠죠.

결국 이런 생태적 변화로 인해 조선 전기 급격히 인구가 증가하게 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도 생겼을 것입니다.

소가 많아지니 당연히 우역이 늘고, 또한 인간들의 천연두(마마)도 늘게 되었겠죠.

우역상황은 현종 대에 극에 달하는데 4 1663년 황해도 해주 곡산에 소의 역병이 크게 번져 1천여두가 죽었으며 강원도에서 죽은 소가 1770마리였습니다.(참고 : 조선의 생태사)

암수가 덩치차이가 상당하더라...

 

비오는날이라 휴대폰이 제대로 셔속을 따라가지 못한다. ㅠ.ㅠ

현종 9919일 함경도에 소와 말의 전염병이 크게 번져 전후로 죽은 수가 2만여마리가 되었다.

(자료출처 : 조선왕조 실록 & 조선생태사)

 

예상하셨겠지만 소와 사람이 더 많이 자주 만나게 되니 천연두 또한 창궐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여기서 호환 마마의 관계가 비례적 관계가 되는 이유가 자연스레 밝혀지죠? 

 

이후 오키나와에서 물소를 들여와 우리 소와 교배를 통해 우수한 종자가 나왔습니다.  

이게 한우입니다.(이 부분은 제가 마을독본이란 잡지에 지난 여름 쯤 일부 기재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뭐 조선 후기라고 해서 호랑이 피해가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1811년 병영계록을 보면 충청도 관찰사가 비변사에 올린 호환피해를 보고하는데 평균 2주일에 한번씩 호랑이 피해를 보고하고 있구요.  남편이 물려가는 것을 부인이 뺏어와서 정려문이 세워지기도 하구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피해를 보는 내용도 보고되고 있어요. 

 

이후로도 일제강점기의 조직적인 호랑이 사냥을 넘어서도 생존합니다.   

흔히 1920년대에 지리산에서 조선에서 마지막 호랑이가 잡혔다고 하는데,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호환피해나 호랑이가 발견되는 사례는 전국에서 나타납니다. 

1960년대 후반까지도 충남 청양에서 경북 영덕에서 강원도와 덕유산자락에서도 죽은 호랑이가 발견되기도 하고, 살아있는 호랑이 새끼가 발견되어 서커스단에 팔기도 합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조선뉴스라이브러리 참조)  

 

1974년 이후로 더 이상 남한땅에서는 야생호랑이에 대한 기록이나 흔적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튼 호환과 마마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거죠.   거기에 목화까지.. ^^ 

이상 쓸데 없는 생태문화 수다 - 쓸.생.수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