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상노트/잡동사니

세탁기와 틀니

잉화달 2008. 12. 2. 00:37

2003년 초   가전대리점을 하던 시절 썼던 글입니다.

 

                                                                         잉화달

 

 

석달전 즈음 꽤나 추운 겨울날 아침이었다.
직원들과 조회를 마치고 매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조금은 이른시간인데 몸빼바지에 원색의 낡은스웨터를 입으신 할머니 한분이
우리매장을 찾아주셨다.

할머니 : "세탁기 있남?"

사 장 : "네 이쪽으로 오시죠? 세탁기 없이 날씨도 추운데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할머니께 꼭 맞는 신제품 세탁기가 나왔는데......"

가전매장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피씨와 네트워크로 8년을 익힌 장사솜씨이다.
유연한 동작으로 할머니께 다가가 접객요령에 의거 친절히 고객응대를 했다.
새로 입사한 신참직원들에게 사장의 고객만족시범을 보이기 위해.. ^^

할머니 : "이중에서 제일 싸고 빨래 잘되는게 뭔감?"

사 장 : 네 이 제품입니다. 무척 싸고 빨래도 잘되고 이불빨래에도 부족함이 없지요.

할머니 : "나 근디 지금 며느리가 준돈 15만원 밖에 없는디....
이거만 주구 나머지는 몇달 나눠서 줘두 디남?"

사 장 : (내심 찜찜한 마음으로)"네. 특별히 금융권에 이상만 없으시면 할부도
가능하거든요?"

할머니 : 나 암껏두 읍구 그냥 저울기(겨울에) 마늘 까서 쪼금씩 허문 그냥 한달에
얼마씩 갚을 수 있는디. 우리 며느리가 세탁기 고장난지 늑달(네달)이
딨는디 찬물루 빨래허는게 좀 힘든감?
그리서..

* 할머니의 신용정보를 조회한 결과 신용불량으로 거래가 불가능했다.
결국 그날 나는 할머니께 연락처만 하나 받고 돌아가시라고 했다.
그날 오후 며느님께 전화를 했고, 며느님은 한사코 세탁기를 살수없다고한다.
어머님의 어금이 하나 있던것이 빠지셔서 새이빨 해 넣으시라고 드린 돈이란다.

* 다음날 할머니 동네의 사정에 밝으신 우리매장 이부장님께 어찌해야 할지 여쭈었다.  이부장님께 들은 이야기로 그 할머님의 외아들은 사업에 실패하고 집을 나가,
연락도 되지 않은지 5년이 되었단다.
그리고 지금의 며느리는 7년전에 첫째부인과 이혼한 아들이 6년전에 재취한
두번째 부인으로 신혼? 6개월만 아들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곤,
지금은 사업에 실패하고 훌쩍 떠나버린 아들을 뒤로하고 홀로 노모를 모신덴다.

* 결국 금이빨과 세탁기로 싸움을 하던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서 나는 어쩔수없는 선택을 했다.
세탁기를 계약금 없이 드리기로 하고, 남은 돈은 아무때나 형편될때 갚으시라 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한사코 마다하시더니.. 그렇다면 4개월을 말미를 주고
매달 11일날 10만원씩을 갚겠덴다.
아무렴 어떤가, 어짜피 못받을것 같은데, 어려운집에 연말 선물하나 한 셈 치지.

* 그후 1월 11일, 2월 11일, 3월 11일까지 꼬박꼬박 며느님이 10만원,
할머니가 10만원, 단 하루도 틀리지 않고 꼬깃꼬깃한 만원짜리 열장씩을
들고오신다.

세상에 가장 믿음직한 우리 매장 1등고객이시다.
1월에 뵌 며느님의 거칠었던 손이 엇그제 뵜을땐 꽤나 고와졌고,
2월에 뵌 할머니의 웃음가엔 살짜기 금니가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고부간이시다

* 다음주 정도엔 새로나온 사은품 주방세트나 들고 한번 찾아뵈야겠다.
우리 매장에서 가장 신용있고 믿음직한 고객을 뵙기위해...
영광스럽게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어머니와 며느님을 뵙기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