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얼의꽃魂의불

동북공정,백제와 마한,돌담불,석촌마을,청양 벽천리의 적석총에 대해..

잉화달 2009. 9. 10. 00:45

 

1917년 촬영된 사진으로 사진상으로도 2-3기가 보입니다.(1995년판 청양군지에서 발췌)

 

제가 이 석총에 관심을 갖었던 것이 1988년 고등학생때와 1996년이었으니 벌써 10년도 훨씬 더 지났네요. 

옛 어르신들의 이야기로 여러기의 석총이 있었다 합니다.  

일본사람들이 1917년경 존재를 조사 해 갔고, 한참 수탈이 심하던 1940년대에 도굴을 해 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6.25때까지도 보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이후 마을이 들어서며, 논가운데 있던 이 적석총들은 모두 마을의 기반을 높이는 축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당시 이야기를 전해주셨던 어르신에 대한 성함이나 나이도 묻지 않았으니..  

아무튼 꽤 연세가 드신 분으로  그 곳 인근 청신여자중학교를 들어가는 곳 방앗간 윗쪽에 위치한

마을 회관에서 인터뷰라고 말하기에도 쑥스럽게 여쭙게 된, 그래서 알게된 사실입니다.

참  한심하고도 불성실한 인터뷰였습니다.  좀 더 일찍 채보와 녹취를 통해 그리고 경지 정리 전의 군내의 모든 마을들의 이미지를 남겼어야 했습니다.    좀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아니 좀 늦었더라도 더 꼼꼼하고 자세하게 취재하고 연구하며 움직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방식은 북방계 고구려와 부여의 적석총과 같으며,

이는 연기군 조치원의 석총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울산의 은현리 적석총보다 훨씬 더 닮았음)

이 무덤의 존재에 대한 공식 자료로 谷井濟一이라는 일본인에 의해 1920년 발표됩니다.

 

 

상당한 규모의 석총(지름이 50m급도 있었음)들은 그 당시 부여와 고구려와 백제가 한 뿌리이며 같은 언어를 썼다는 것 이외에 온돌과 더불어 삼한지역에 까지 그네들의 영향력이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나마 사진으로 남아있는 것이 다행이다 싶습니다.

 

들녘 한 가운데  논 가운데 이렇게 돌이 많은 축대를 높이 쌓은 마을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돌담불,돗담불,독담불이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석촌(石村)이라 불렀습니다.

서울의 석촌동과 같은 이름이죠.

 이렇게 논 가운데 90센티-1미터 높이로 모두 돌로 축대가 되어버렸습니다. ㅠ.ㅠ

 저렇게 큰 돌들이 산처럼 여러기가 쌓여있었답니다.  

석촌동의 석촌고분군을 가보신 분들은 연상이 가능하겠죠?

 이 마을 전체의 바닥이 모두 이 돌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소위 삼한이라 칭하던 시절 옛 마한(고마한-고마나루(공주) 고마수영(보령충청수영)등등의 어원으로 추측)땅의 깊숙한 동네 가장 큰 부족국가중 하나였던 구로국의 한 복판에  이렇게 북방계의 고분군이 있었습니다.     

또한 백제의 세력범위와  남부여라 칭했던 성왕의 부여에 대한 집착과 정통성, 그리고 고구려와의 관계의 설화적 증명 등등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반박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될 귀한 무덤들이  이렇게 마을이 되어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그나마 저런 사진과 보고서 문헌정도라도  있다는 것이 다행한 일인것인가요.

  

 

* 청양의 석총과 쌍둥이 모양을 했던 조치원 석총을 생각해보며 잠시 끄적임-

 

청양 벽천리의 석총과 쌍둥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규모나 모습이 닮아있는 조치원의 석총은 전에 1999년경에 인터넷으로 사진을 분명 본것으로 기억합니다.

지난번 조치원 문화원에서 생태강의를 할 기회가 있어  현재 문화원의 이사님께도 여쭙고 했는데  그 존재를 모르고 계셨습니다.

참고하려고 인터넷상에서 이미지를 찾았지만,  기억에도 생생하던 칡덩굴이 덮인 석총의 모습을 인터넷과 문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미지를 올리지 못합니다. 이해 부탁합니다. ~~

 

제 기억을 더듬어 언급합니다.   조치원읍 근처의 적석총은 무문토기가 무덤 내부에서 나왔고, 인근에서 청동마형대구가 발견되며 평북 용현면과 대비되는 묘제에 학계를 놀라게 했었습니다.

 

연기군 조치원읍의 석총이  청양에서 일제의 누군가가 도굴해간  것들과  유사 할 것으로 추측해 본다면

묘제 형태나 시기로 보아 검이 나왔을지, 방울이 나왔을지, 청동마형대구라도 나왔을지..

청양땅의 그 석총이 온전히 보존이 되었더라면 어떤 유물이 우리를 놀라게 했었을까...

구로국과 고량부리현, 그리고 백제와 마한과의 관계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었을...

혹은 북방의 고구려의 적석총과 같은 맥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물이 출토 될 수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하니...

불과 수십년 전에 행해진 도굴과 무덤의 훼손에 더더욱 아깝고 안타까운 맘을 금할 수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