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산책] 함박산, 함박골, 허벅지와 흠뻑 젖은 땅
청양군 정산면을 지날 때마다 함박산을 본다.
옛 정산현은 이 산을 등지고 고을을 펼쳤다. 함박산은 그저 배경이 아니라, 고을의 등을 받쳐주는 진산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왜 하필 ‘함박산’일까? 예전 어른들은 이 함박을 ‘대박’의 뜻으로 풀기도 했다.
함박이 곧 크게 벌어진 그릇이고, 넉넉하게 담는 그릇이니, 함박산을 두고 “크게 복을 담는 산”쯤으로 읽은 것이다.
엄밀한 어원 풀이로야 조심해야겠지만, 나는 이런 해석을 쉽게 버리고 싶지 않다.
땅이름은 늘 문헌 속에서만 태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 산을 어떻게 보았고, 어떤 감각으로 불렀고, 또 어떤 바람을 그 이름에 덧입혔는지도 함께 보아야 한다.
함지박과 함박의 관계
‘함박’이라는 말은 본래 함지박을 떠올리게 한다.
함지박은 통나무 속을 파서 만든 크고 둥근 그릇이다. 넓고 오목하고, 무엇인가를 넉넉히 담을 수 있다. 그래서 ‘함박’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크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둥글게 벌어지고, 안으로 품고, 가득 담는 감각이 함께 들어 있다.
이 감각은 여러 말로 번져간다.
함박웃음은 얼굴 전체에 가득 번지는 웃음이다. 입꼬리만 살짝 올리는 웃음이 아니라, 얼굴이라는 그릇이 환하게 열리는 웃음이다. 함박눈도 그렇다. 가늘고 날카로운 눈발이 아니라, 크고 탐스럽게 내려앉는 눈이다. 함박꽃 역시 작고 날렵한 꽃이 아니라, 둥글고 풍성하게 피어난 꽃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함박골은 어떤 골짜기였을까.
대개 이런 이름은 함지박처럼 넓고 오목한 골짜기, 혹은 산줄기가 둥글게 감싸 안은 지형에서 붙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경골, 호리병골, 솥골, 절구통골처럼 우리 땅이름에는 지형의 생김새를 생활도구에 빗대어 부른 예가 많다.
사람은 낯선 지형을 그냥 추상적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익숙한 사물에 기대어 기억한다.
골짜기가 둥글게 파였으면 함박이 되고, 좁게 잘록했다가 넓어지면 호리병이 되고, 우묵하게 꺼져 있으면 솥이 된다.
함박과 허벅의 관계
흥미로운 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허벅’이다.
제주도의 물허벅은 배가 둥글고 불룩한 물동이다. 물을 담기 위해 몸통이 두툼하게 부풀어 있다.
허벅지도 마찬가지다. 넓적다리 가운데 살이 둥글고 두툼하게 붙은 부분을 가리킨다.
‘허벅’이라는 소리에는 밖으로 활짝 벌어진 느낌보다는, 안에 무엇인가가 차올라 불룩해진 느낌이 있다.
함박과 허벅은 서로 멀리 떨어진 말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놓고 보면 닮은 점이 많다.
둘 다 둥글고, 두툼하고, 무엇인가를 담거나 머금은 형상과 관련된다.
다만 함박은 밝고 넓게 벌어진 쪽에 가깝고, 허벅은 묵직하고 불룩하게 찬 쪽에 가깝다.
함박이 그릇의 입구처럼 열려 있다면, 허벅은 그릇의 배처럼 부풀어 있다.
흠뻑 젖다. 함박 웃다.
이때 ‘흠뻑’이라는 말도 함께 떠오른다.
흠뻑 젖었다는 것은 조금 묻은 정도가 아니다. 물기가 속까지 가득 스민 상태다.
‘함빡’이라는 말도 있다. 웃음을 함빡 머금었다고 할 때, 그것은 감정이 얼굴 안에 가득 찬 상태다. 함박, 함빡, 흠뻑은 서로 완전히 같은 어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말의 감각 속에서는 ‘가득함’, ‘머금음’, ‘넉넉함’, ‘둥근 포용’이라는 의미망으로 가까이 붙어 있다.
나는 이런 말들을 볼 때마다, 우리말이 지형을 얼마나 몸으로 읽었는가를 생각한다.
산은 높이로만 기억되지 않았다. 골짜기는 깊이로만 기억되지 않았다. 어떤 산은 솟은 모양으로, 어떤 골은 품은 모양으로, 어떤 들은 물이 고이는 방식으로 이름을 얻었다. 땅이름은 지도 위의 표지가 아니라, 몸의 감각으로 번역된 지형의 기억이다.
매함장과 함지박
태백시 철암동의 ‘매함장’도 그런 눈으로 볼 수 있다.
나는 그곳을 여러 차례 찾아가 보았다. 철암동을 둘러싼 산줄기는 마을을 넓게 감싸 안고 있다. 그래서 이 이름을 단순히 ‘매함지’라는 사물 비유로만 볼 것이 아니라, ‘매’, 곧 ‘뫼’와 관련된 산 이름의 감각으로 읽어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 우리 지명에서 뫼가 매로 바뀌어 남은 예는 적지 않다. 매봉, 매산, 매바위 같은 이름들이 모두 실제 현장에서는 산이나 봉우리와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매함장은 ‘뫼가 함지처럼 감싸 안은 자리’, 또는 ‘산줄기가 넓게 둘러 품은 곳’이라는 식으로 읽어볼 수 있다. 물론 이것도 단정은 아니다. 다만 현장의 지형을 직접 보고, 산줄기가 마을을 어떻게 안고 있는지를 반복해서 확인한 뒤라면, 이 해석은 충분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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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자 ‘함’도 흥미롭게 겹친다.
함양, 함라, 함열, 함안 등에 쓰이는 咸 자는 ‘다’, ‘모두’, ‘함께’라는 뜻을 가진다.
순우리말 함·흠 계열에서 느껴지는 ‘가득 품음’의 감각과, 한자 咸이 가진 ‘빠짐없이 모두 아우름’의 뜻은 우연히도 서로 닿아 있다. 물론 한자 표기와 순우리말 어근을 곧바로 같은 뿌리로 묶어서는 안 된다.
합천처럼 한자 표기가 다른 경우도 있고, 지역마다 이름이 형성된 과정도 제각각이다.
다만 땅이름의 세계에서는 이런 겹침이 자주 일어난다.
원래의 소리, 지형의 생김새, 뒤에 붙은 한자, 사람들이 새롭게 덧입힌 뜻이 한자리에 포개진다.
처음에는 지형을 보고 붙인 이름이었을 수 있다. 나중에는 한자로 옮기며 뜻이 바뀌었을 수 있다.
또 그 뒤에는 마을 사람들이 복과 풍요와 고을의 운명을 담아 다시 해석했을 수 있다.
땅이름은 한 번 붙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조금씩 새 뜻을 입는다.
정산의 함박산을 지나며 떠올린 것도 바로 그것이다.
함박은 그릇이다. 함박은 웃음이다. 함박은 눈송이다. 함박은 골짜기다. 함박은 산이 고을을 품는 방식이기도 하다.
허벅은 물을 담는 둥근 몸통이고, 허벅지는 생명의 힘이 붙은 두툼한 살이다. 흠뻑은 물이 속까지 스민 상태이고, 함빡은 감정이 얼굴에 가득 찬 상태다.
결국 이 말들은 모두 비슷한 곳을 향한다.
둥글게 품는 것 / 넉넉하게 담는 것 / 안으로 차오르는 것 / 밖으로 환하게 번지는 것.
그래서 함박산은 단순히 큰 산이 아니다.
그 이름 속에는 고을을 담는 산, 사람의 바람을 품는 산, 물과 골짜기와 마을을 둥글게 안는 산의 감각이 들어 있다.
다시 보면 옛 어른들이 함박을 대박으로 풀었던 것도 아주 엉뚱한 해석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 분들은 국어학 사전을 펼친 것이 아니라, 산이 고을을 품는 모양과 그 품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바람을 함께 읽었을 것이다.
땅이름을 거두어 들이는 일은 그런 일이다.
말의 뿌리를 하나로 못 박는 일이 아니라, 말과 지형과 사람의 감각이 어디서 만나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함박산 아래를 지날 때마다 나는 그 산이 하나의 큰 함지박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안에 정산현의 오래된 시간, 고을 사람들의 삶, 물과 골짜기와 웃음이 흠뻑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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