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터무늬-지명, 땅이름 이야기

함열, 함창, 함안, 함라, 합천, 고마, 곰개, 아라, 아시, 마리, 함(咸·含)과 합(陜) 공주와 익산, 의령 등 과거 가야 및 금강 백

잉화달 2026. 6. 6. 14:32

 
이 글은 과거 10년 전 초고 상태로 놓아두었던 6페이지 분량의 글을 
최근 서천의 문헌서원 강의에서 학습자의 요청을 받아 일부 다듬어 새롭게 포스팅한 글 임으로 최근에 밝혀진 사실등이 있다면, 내용을 담지 못하고 풀어낸 10년 전의 글 임을 밝힙니다. 
 
 

···고마·가마와 함·합 아라·아시·마리의 비교적 해석

 
 
1. 연구의 출발점
 
함안·함창·함양·합천은 모두 옛 가야 문화권 또는 가야와 긴밀하게 연결된 지역에 자리한다. 오늘날의 지명에는 각각 함(咸·含)과 합(陜)이라는 서로 다른 한자가 사용되지만, 한자를 걷어 내고 그 이전의 지명과 지역의 역사적 위상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 지역들은 대체로 넓은 영역의 중심지이거나, 큰 읍락이 있었던 곳이며, 왕과 지배층의 무덤이 조성된 곳이다. 또한 ‘큰 고을’, ‘우두머리의 산’, ‘마리현’과 같이 크기·머리·우두머리를 뜻하는 지명이 함께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함과 합은 고대어 감·검·곰에서 유래했으며, 감·검·곰은 크고 신성한 우두머리를 뜻했다.” 그러나 각각의 지명이 만들어진 시기와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모든 함과 합을 하나의 어원으로 직접 연결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 지명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언어적 경로를 거치면서도, 반복적으로 다음 의미를 표현해 온 것으로 보인다.
 
함과 합 곰과 금 계열의 지명들의 의미
→ 처음인 곳
→ 앞과 위가 되는 곳
→ 머리와 우두머리의 자리
→ 왕과 조상이 있는 중심지
→ 크고 신성한 고을
 
따라서 본고에서는 함·합·감·검·곰·고마·가마가 반드시 하나의 어원에서 갈라졌다고 단정하기보다, 이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시작·머리·우두머리·중심·신성’이라는 공통된 의미장 안에서 만나고 중첩되었을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지명 연구의 관점과 방법
 
2.1. 지명의 한자는 기원이 아니라 후대에 덧 입혀진 경우도 많음.
고대의 토박이 지명은 기록 과정에서 비슷한 소리의 한자로 옮겨지거나, 본래 뜻과 가까운 한자로 번역되었다.
이후 행정구역 개편과 지명 개칭을 거치면서 전혀 새로운 한자 이름이 붙기도 했다.
특히 신라 경덕왕 대의 지명 개정은 기존 지명을 한자로 단순히 음차한 작업만은 아니었다. 기존 이름의 뜻을 번역하거나, 중국식 지명과 길상적인 글자를 새로 붙이는 일도 함께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함안·합천이라는 한자만 보고 그 지명의 최초 의미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현재 이름 이전의 지명, 지역의 지형, 정치적 위상, 왕릉과 제의시설 등을 함께 살펴야 한다.
 
2.2. 직접 어원과 의미망을 구분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지명 사이의 관계를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째는 문헌으로 변화 과정이 확인되는 관계이다. 감물아현이 함열현으로 바뀐 사례처럼 옛 이름과 후대 이름이 기록상 연결되는 경우이다.
둘째는 직접적인 소리 변화는 입증하기 어렵지만, 의미가 계속 이어지는 관계이다. 옛 이름은 ‘큰 고을’을 뜻하고 후대에는 함·합 계열 지명이 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소리와 의미, 문화적 상징이 서로 닮아 비교할 수 있는 관계이다. 아시·아사·아라타, 마리·머리, 감·검·곰·고마·가마 등이 여기에 속한다.
세 번째 단계는 어원 확정이 아니라, 고대인들이 세계를 인식하고 이름 붙인 방식을 탐구하기 위한 비교적 가설이다.
 
 
3. 가야권의 함·합 지명군
 
3.1. 함안: 아라·아시라와 말이산, 그리고 함안
함안은 아라가야 또는 안라국의 중심지였다.
문헌에는 이 나라의 이름이 아라·아야·아나·안라·아시라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은 서로 다른 나라 이름이라기보다, 토박이말을 여러 기록자가 각기 다른 한자로 옮겨 적은 결과로 이해된다.
아라가야 왕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산은 말이산이다. 말이산의 ‘말이’는 마리 또는 머리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말이산은 곧 ‘머리산’ 또는 ‘우두머리의 산’을 뜻하는 이름으로 해석된다.[자료 1]
이곳은 실제로 산줄기 가운데 가장 높고 큰 산이라는 의미를 넘어, 아라가야를 이끌던 왕과 지배자들이 묻힌 정치적·제의적 머리였다.
아라가야가 신라에 편입된 뒤인 757년, 이 지역의 행정명은 함안군으로 바뀌었다. 아라·아시라에서 함안으로 직접 소리가 변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라가야의 왕도였으며, 우두머리의 산인 말이산을 품은 지역에 ‘함’이라는 새 이름이 붙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함안의 함이 곧 감·곰에서 왔다고 입증할 수는 없지만, 함안이라는 새 이름이 기존 지역이 지녔던 왕도·우두머리·중심지의 위상과 어울리는 이름으로 선택되었을 가능성은 검토할 수 있다.
 
따라서 함안에서는 세 시대의 지명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장소성을 드러낸다.
아라·아시라
― 나라와 정치집단의 이름
말이산
― 우두머리와 왕들이 자리한 산
함안
― 왕도가 있던 중심 고을에 붙은 후대의 행정명
 
세 이름이 동일한 어원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중심과 우두머리의 자리’라는 하나의 장소적 의미망 안에서 읽을 수 있다.
 
 
3.2. 함창: 큰 읍에서 함녕과 함창으로
상주 함창은 전통적으로 고령가야가 있던 곳으로 전해진다. 옛 이름은 고동람군 또는 고릉군이었으며, 고동람은 ‘큰 읍’ 또는 ‘긴 읍’을 뜻하는 이름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 지역은 경덕왕 때 고령군이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함녕군을 거쳐 함창으로 바뀌었다.[자료 2]
함창의 함이 고동람의 특정 음절에서 직접 변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중요한 점은 이름이 바뀌는 동안에도 이곳이 계속해서 ‘크고 중요한 읍’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이다.
고동람 ― 큰 읍
고령 ― 오래되고 중요한 고을
함녕·함창 ― 후대의 중심 행정지명
 
함창은 함이라는 음이 고대부터 그대로 유지된 사례라기보다, 큰 읍이라는 옛 장소성이 후대의 함 계열 지명과 결합한 사례로 볼 수 있다.
 
 
3.3. 합천: 다라국과 대야성, 그리고 합주·합천
합천 지역에는 가야의 유력 정치체였던 다라국이 자리했다. 옥전고분군은 다라국 최고 지배층의 공동묘역으로 이해된다.
합천의 옛 이름에는 대량주와 대야성이 있다. 대야성은 ‘큰 고을’ 또는 ‘큰 들의 성’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이후 강양군을 거쳐 고려시대에는 합주, 조선시대에는 합천이 되었다.[자료 3]
오늘날 합천의 합이 고대어 감이나 곰에서 직접 변화했다고 단정할 자료는 부족하다. 그러나 합천 역시 가야시대부터 큰 고을이었으며, 지배층의 무덤과 정치적 중심지가 있던 곳이다.
합천의 이름 변화에서도 함창과 비슷한 구조가 나타난다.
다라국의 지배 중심지
→ 대야·대량이라는 큰 고을
→ 합주·합천이라는 후대 중심지명
 
따라서 합천의 합은 감·곰의 직접적인 음차라기보다, ‘크고 중요한 중심 고을’이라는 장소적 기억이 다른 이름과 글자를 입으며 이어진 사례로 이해하는 편이 안전하다.
 
 
3.4. 함양과 마리현: 함과 머리가 한 공간에 남은 사례
함양은 가야의 핵심 왕도라기보다 가야·백제·신라 세력이 접하던 경계지역이었다. 그러나 함·마리 의미망을 검토할 때 매우 중요한 사례이다.
함양의 옛 이름은 속함군 또는 함성이었다. 경덕왕 때 천령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고려시대에 다시 함양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속함군이 거느렸던 지역 가운데 마리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리현은 경덕왕 때 이안현으로 개칭되었으며, 오늘날 함양군 안의면 일대로 비정된다.[자료 4]
즉, 하나의 고대 행정권역 안에 다음 두 이름이 함께 존재했다.
속함·함성
마리현
 
마리현의 마리를 곧바로 머리 또는 우두머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함안 말이산이 공식적으로 머리산·우두머리의 산으로 해석되는 점과 함께 비교하면, 함양 일대의 속함과 마리현의 공존은 의미 있는 자료가 된다.
함·감·곰 계열이 중심과 권위를 나타내고, 마리·머리가 위와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의미망을 형성했다면, 함양과 마리현의 관계는 그 두 갈래가 실제 공간 안에서 만나는 사례일 수 있다.
 
 
3.5. 비교 사례: 함열과 공주 고마나루
가야권 밖의 지명은 함·합 의미망을 검토할 수 있는 중요한 비교 기준이 된다.
익산 함열은 백제시대 감물아현이었으며, 경덕왕 때 함열현으로 바뀌었다. 감물아의 감과 함열의 함이 문헌상 앞뒤 지명으로 연결되므로, 감과 함의 관계를 검토하기에 좋은 사례이다.
함열 인근에는 함라산이 있고,  곰개나루를 한자로 옮긴 웅포가 있다. 익산 일대에는 금마라는 이름도 남아 있다. 감·곰·금·웅 계열의 지명이 비교적 좁은 지역에 중첩되어 있는 셈이다.[자료 5]
공주의 고마나루는 더욱 분명한 사례이다. 고마는 곰의 옛말이며, 이를 한자로 옮긴 이름이 웅진이다. 고마나루는 백제 왕도의 이름이었으며 국가적 제의가 이루어진 웅진단도 자리했다.
고마가 처음부터 왕이나 신을 뜻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곰의 이름을 지닌 나루가 왕도의 이름이 되고, 국가가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가 되었다는 사실은 ‘곰·고마’가 단순한 동물명을 넘어 정치적·제의적 중심의 상징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4. ‘시작·머리·중심·신성’으로 이어지는 의미망
 
4.1. 아시: 처음과 초벌
아시갈이는 처음 가는 논밭을 뜻하고, 아시빨래는 본격적으로 빨기 전에 먼저 하는 애벌빨래를 뜻한다. 아시는 처음·첫 번째·초벌의 의미를 지닌 말로 사용되어 왔다.
아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숙함을 뜻하기도 하지만, 모든 일이 거기에서 시작된다는 의미도 지닌다.
아시
→ 처음
→ 첫 단계
→ 발원과 시작점
 
아라가야의 이칭 가운데 아시라가 있다는 점은 이 의미망에서 매우 흥미롭다. 아시라를 곧 ‘처음의 나라’라고 풀이할 수는 없지만, 처음을 뜻하는 아시와 비교해 볼 여지는 충분하다.
 
 
4.2. 아이·아기·아지: 처음 생겨난 존재
아이와 아기는 막 태어나 삶을 시작한 존재이다. 강아지·송아지·망아지 등에 붙는 아지는 작고 어린 새끼를 나타낸다.
아이·아기·아지가 모두 동일한 어원에서 갈라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이 말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 인식을 품고 있다.
작고 어린 것
= 새로 태어난 것
= 이제 막 시작된 것
= 앞으로 자라날 근원
 
따라서 아시의 ‘처음’과 아이·아기·아지의 ‘새로 태어남’은 하나의 문화적 의미망 안에서 만날 수 있다.
 
 
4.3. 일본어 아사·아라타·아타라시이와의 비교
일본어 아사(あさ)는 아침을 뜻한다. 아침은 하루가 처음 열리는 시간이다.
일본어 아타라시이(あたらしい)는 새롭다·신선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아라타시(あらたし)에서 소리의 위치가 바뀌어 형성된 것으로 설명되며, 오늘날에도 아라타(あらた)가 ‘새로운, 새로이’라는 뜻으로 남아 있다.[자료 6]
아사 ― 하루의 시작
아라타·아타라시이 ― 새것, 새로움(아라타=>어리다)
아시 ― 처음과 초벌
아이·아기·아지 ― 새로 태어난 존재
 
이 말들이 모두 하나의 공통 어원에서 나왔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어와 일본어의 오래된 어휘에서 ‘아’로 시작하는 여러 말이 처음·아침·새것·어린 생명을 표현한다는 점은 비교언어문화적으로 흥미롭다.
이는 아라·아시라라는 가야의 이름을 ‘새롭게 열린 곳, 처음의 중심’이라는 의미망 안에서 검토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다만 직접적인 어원 증거라기보다, 동아시아 언어에서 반복되는 인식 구조를 보여주는 비교 사례로 다루어야 한다.
 
 
4.4. 마리·머리: 위에서 우두머리로
머리는 몸의 가장 위쪽에 있다. 사람이 나아갈 때 가장 먼저 앞으로 나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머리는 신체의 한 부분을 넘어 다음과 같은 뜻으로 확장되었다.
몸의 머리
→ 사물의 위쪽과 앞쪽
→ 순서상 첫 번째
→ 무리의 우두머리
→ 지역과 나라의 중심
 
산머리·물머리·글머리·말머리·우두머리 등의 표현에는 이러한 인식이 남아 있다.
함안 말이산은 이 의미 확장을 실제 지명으로 보여준다. 말이산은 단지 높은 산이 아니라 왕과 지배자들이 묻힌 ‘우두머리의 산’이었다.
처음과 머리는 서로 다른 개념이 아니다. 행렬의 맨 앞이 머리이고, 물이 처음 시작되는 곳도 물머리이며, 글이 시작되는 부분도 글머리이다.
따라서 아시의 ‘처음’은 마리·머리의 ‘앞과 위’로 이어지고, 머리는 다시 우두머리와 중심으로 확장된다.
 
 
4.5. ···고마: 크고 신성한 중심의 가능성
감·검·곰·고마 계열을 신·왕·우두머리·크고 신성한 존재와 연결하는 해석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단군왕검의 검, 고마나루의 고마, 곰 신앙과 제의문화 등을 하나의 의미망에서 바라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감·검·곰·고마가 모두 하나의 어근에서 규칙적으로 분화했다는 사실은 아직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 물가나 강변을 뜻하는 말, 동물 곰의 이름, 왕과 제사장을 나타내는 호칭 등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합쳐졌을 가능성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사전적 원뜻을 확정하는 일이 아니다. 고대인의 세계에서 다음 존재들이 서로 긴밀하게 이어졌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인 존재
= 가장 위에 있는 존재
=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
= 크고 강한 존재
= 왕과 조상
= 신성한 존재
= 공동체의 중심
 
감·검·곰·고마는 이러한 권위와 신성의 의미가 모이는 음형군으로 검토할 수 있다.
 
 
4.6. 가마: 머리의 중심과 품는 형상
가마는 특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말이다. 가마솥, 불을 때는 가마, 사람이 타는 가마, 머리카락의 가마는 서로 다른 기원을 지닌 동음이의어일 수 있다.
그럼에도 형상과 문화적 인식의 차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머리의 가마는 머리카락이 소용돌이치며 시작되는 정수리의 중심이다. 가마솥과 불가마는 안에 무언가를 품고 변화시키는 공간이다. 가마골·가마봉 등의 지명은 오목하게 둘러싸이거나 솥과 비슷하게 생긴 지형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가마를 고마·감과 직접 같은 어원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다음 의미에서는 서로 만날 수 있다.
위쪽의 중심
안으로 품는 자리
생명과 물질이 새롭게 변화하는 공간
불과 제의가 이루어지는 중심
 
가마는 감·곰·고마와 마리·머리 사이를 형상적으로 연결하는 비교 어휘가 될 수 있다.
 
 
 
5. 의미망의 종합 구조
 
지금까지의 관계를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시·아사·아라타
처음, 아침, 새로 열림

아이·아기·아지
새로 태어나고 자라기 시작한 생명

마리·머리
처음, 앞, 위, 흐름의 시작점

우두머리
무리의 앞에 선 지도자

왕과 조상
공동체를 열고 이끈 존재

감·검·곰·고마
크고 권위 있으며 신성한 중심

왕도·큰 읍·왕릉의 산·제의 공간
 
이 구조에서 ‘처음’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먼저라는 뜻에 머물지 않는다. 처음 시작한 존재는 조상이 되고, 조상은 공동체의 머리가 되며, 머리가 자리한 곳은 정치적·제의적 중심이 된다.
그 중심은 크고 신성한 곳으로 기억되며, 지명은 이를 아라·아시라·마리·말이·감·곰·함·합 등의 서로 다른 소리와 글자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다.
 
 
 
6. 함안을 다시 읽는 방식
 
함안의 옛 이름인 아라·아시라, 왕릉의 산인 말이산, 후대 행정명인 함안을 하나의 직접적인 어원 계보로 연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세 이름은 각 시대가 같은 장소를 이해한 방식을 보여준다.
아라·아시라는 나라가 시작되고 펼쳐진 중심의 이름이었다.
말이산은 그 나라를 이끈 우두머리들이 묻힌 산이었다.
함안은 그 왕도와 중심 고을에 후대에 붙은 이름이었다.
따라서 함안의 함을 곧바로 곰이나 감의 음차라고 단정하는 대신,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함안의 함은 아라·아시라와 말이산이 지녔던 ‘처음·머리·우두머리·왕도·신성한 중심’이라는 장소성을 후대의 한자 지명이 다시 표현한 흔적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해석은 직접 어원론보다 범위가 넓다. 지명을 단순히 소리가 변한 결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장소의 성격과 위상이 시대마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반복 표현되었다고 보는 방식이다.
 
 
 
7. 잠정 결론
 
가야권의 함안·함창·합천·함양은 각각 서로 다른 지명 변화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이 지역의 모든 함과 합이 하나의 고대어 감·검·곰에서 직접 변화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들 지역의 옛 지명과 역사적 장소성을 함께 살펴보면 반복되는 공통 구조가 나타난다.
 
함안에는 아라·아시라라는 나라 이름과 우두머리의 산인 말이산이 있다.

함창의 옛 이름 고동람은 큰 읍으로 해석된다.

합천은 다라국의 중심지였으며 대야·대량이라는 큰 고을의 이름을 지녔다.

함양의 옛 속함군 영역에는 마리현이 함께 존재했다.

함열에서는 감물아가 함열로 이어지고, 인근에는 함라산과 곰개를 옮긴 웅포가 남아 있다.  함라와 함열을 해석할 때 모두를 품는 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공주의 고마나루는 웅진으로 번역되고 왕도와 제의의 중심이 되었다.
 
이 자료들은 ‘함·합=감·곰’이라는 하나의 공식보다 더 큰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대 지명에서 처음·앞·위·머리·우두머리·왕·조상·큰 고을·신성한 중심은 서로 분리된 개념이 아니었다. 한 의미가 다른 의미를 낳고, 서로 다른 말들이 같은 중심을 향해 모였다.
처음인 곳이 머리가 되고,
머리가 자리한 곳이 중심이 되며,
중심에는 왕과 조상이 모이고,
그곳은 크고 신성한 고을로 기억된다.
 
가야권의 함·합 지명군은 이러한 고대적 공간 인식과 세계관이 여러 시대의 지명 속에 겹겹이 남아 있는 흔적일 수 있다.
 
 
 
8. 후속 연구 과제
 
이 가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다음 조사가 필요하다.
첫째, 가야권과 그 인접 지역의 감·검·곰·고마·가마·함·합·마리·말이·아라·아시 계열 지명을 지도화할 필요가 있다.
둘째, 757년 경덕왕대 지명 개칭 이전과 이후의 이름을 비교하여, 기존 장소의 의미가 새 한자 지명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었는지 살펴야 한다.
셋째, 각 지명이 왕릉·산성·제의시설·읍치·물의 발원지·산줄기의 머리와 실제로 어떤 공간 관계를 맺는지 현장에서 확인해야 한다.
넷째, 지역 주민들이 전승해 온 토박이 발음과 지명 유래를 수집하여 문헌 기록과 비교해야 한다.
다섯째, 일본어 아사·아라타·아타라시이 및 가미 등의 비교 사례는 한국어와 직접 같은 어원이라고 전제하지 말고, 고대 동아시아의 ‘시작·위·신성’ 인식 구조를 비교하는 자료로 활용해야 한다.
지명의 어원은 하나의 글자를 풀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지형과 역사, 언어와 신앙, 사람들의 공간 인식이 만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그 오래된 의미가 드러난다.
 
 

자료 확인 메모

 
함안·말이산
아라가야의 이름은 아라·아시라·아야·아나·안라 등으로 전하며, 함안은 757년에 개칭되었습니다. 국가유산포털은 말이산을 ‘머리+산’, 곧 ‘우두머리의 산’으로 설명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함창
함창은 고령가야국 전승이 있는 지역이며, 옛 이름 고동람은 대읍 또는 장읍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후 함녕을 거쳐 함창으로 바뀌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합천·다라국
합천 옥전고분군은 다라국 지배층의 묘역이며, 합천의 옛 이름은 대량주·대야성, 강양군, 합주를 거쳐 합천으로 변화했습니다. 대야성은 큰 고을이었다는 해석이 전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함양·마리현
함양은 속함군·함성으로 불리다가 757년 천령군으로 바뀌었고, 고려시대에 함양이 되었습니다. 속함군의 영현 가운데 마리현이 있었으며, 마리현은 현재 함양군 안의면 일대로 비정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함열·웅포·고마나루
함열은 백제의 감물아현에서 경덕왕 때 함열현으로 바뀌었으며, 인근 함라산 자락과 금강이 만나는 곳의 웅포는 곰개나루에서 유래했습니다.
익산 지역 자료들은 함라와 함열을 "모두를 품는 큰 것의 의미를 담고 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공주 고마나루의 고마는 곰의 옛말이며 한자로 웅진이라 썼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본어 아타라시이
일본어 아타라시이는 새롭다·신선하다는 뜻이며, 아라타시에서 아타라시로 소리의 위치가 바뀐 음위전환 사례로 설명됩니다. (コトバンク)
 
해석상의 주의점
감·검·곰·고마와 신성·조상·제의문화의 관계는 일부 문화언어학 연구에서 적극적으로 제기되어 왔지만, 고유명사 어원 연구는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이 크므로 직접 어원과 문화적 의미망을 구분해야 합니다. (KCI)
 
특히 속함군 안에 마리현이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좋은 연결점입니다.
함안의 말이산과 함께 놓으면, ‘마리·머리의 의미망을 가야권 북서부까지 확장해 검토할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