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전모랭이, 홍산현 성 아래 돌아앉은 마을
부여군 홍산면 남촌4리에는 ’닻전’이라고도 하고 ’모랭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 있다.
마을 표석에는 “닷전 모랭이 마을”이라는 이름도 보인다. 닻전, 닷전, 모랭이.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이름들이 한 마을 안에 겹쳐 있다. 처음 이 이름을 보면 누구나 ’닻’을 먼저 떠올릴 수 있다. 배를 붙잡는 그 닻 말이다. 그래서 금강과 금천 지류를 따라 올라온 배가 이곳 어디쯤 닻을 내렸다는 식의 이야기도 가능하다.
또 홍산장이 번성했던 곳이니 닭을 사고파는 닭전이 있었고, 그것이 닻전으로 변했다는 해석도 있을 수 있다.
장터가 있던 고장에서는 소전, 우시장, 닭전 같은 이름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으니 이 역시 쉽게 버릴 수 없는 설명이다.
하지만 닻전모랭이라는 이름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면, 이 마을의 핵심은 단순히 닻도 아니고 닭도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이 이름을 여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성하마을’이라는 위치에 있다.
남촌4리는 홍산현의 옛 읍치와 성곽 아래쪽에 놓인 마을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에 성하라는 단어를 쓴 듯 보인다.
홍산은 조선시대 홍산현의 중심지였고, 관아와 객사, 동헌, 읍성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고장이다.
마을 뒤쪽으로는 홍산읍성의 흔적이 이어지고, 그 아래로 마을과 길, 들판과 장터 공간으로 전형적인 과거 고을의 구조다 펼쳐진다.
그러므로 이곳은 단순한 들마을이 아니라, 성 아래에 기대어 살아온 마을이다. 말 그대로 성하마을이다.
여기서 ’잣’이라는 옛말을 떠올릴 수 있다. 잣은 성을 뜻하는 오래된 말로 알려져 있다.
다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잣은 평지에 반듯하게 둘러친 성곽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 지명 속에서는 대체로 산성과 깊이 연결된다. 잣미, 잔미, 성미, 잣고개, 잣나무골 같은 이름들을 보면, 대부분 산줄기와 고개, 산성지형과 맞닿아 있다. 잣은 단순히 사람이 돌을 쌓아 만든 시설 이름이 아니라, 성이 들어설 만한 도드라진 산줄기, 고개를 장악한 자리, 방어의 힘을 가진 지형과 함께 살아온 말로 보인다.
그렇게 보면 닻전모랭이는 ’잣전모랭이’였을 가능성을 품게 된다.
잣전은 성 앞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성은 평지성이 아니라 산자락과 산줄기를 타고 이어지는 방어 지형이다.
따라서 잣전모랭이는 단순히 “성 앞 마을”이라는 뜻을 넘어, “산성지형 앞쪽의 모퉁이 마을”이라는 풍경을 가리킬 수 있다.
이 해석이 중요한 까닭은 ’모랭이’라는 말과도 잘 맞기 때문이다.
모랭이는 모퉁이, 모롱이, 모탱이와 같은 계열의 말로 볼 수 있다.
산자락이 굽어 돌아가는 곳, 길이 꺾이는 자리, 들판으로 내려온 산줄기의 끝이 방향을 바꾸는 곳을 가리킬 때 이런 말이 흔히 쓰인다. 닻전모랭이는 이름 자체가 이미 “모퉁이”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마을 이름은 성 아래라는 역사적 위치와 산모퉁이라는 지형적 위치가 겹쳐진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자 그러니 정리하면 닻전모랭이는 이렇게 읽을 수 있다.
홍산현 성 아래, 산줄기가 들판으로 내려오다가 굽어 돌아앉은 곳.
성의 앞이면서 산모퉁이인 곳.
읍치와 장터, 마을과 들판이 서로 만나는 경계의 자리.
이제 ’닷전’이라는 표기도 다시 보인다. 닷전의 ’전’은 밭 전田일 수도 있고, 앞 전前일 수도 있다.
실제 지명에서는 이 둘이 서로 겹치는 일이 많다. 산성 아래의 앞쪽 공간은 대개 밭이 되고, 길이 되고, 장터가 되고, 마을이 된다.
그러니 잣전前, 곧 성 앞이라는 말과 닷전田, 곧 산자락에 붙은 밭이라는 말이 현장에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달밭, 달전, 월전, 월평 같은 전국의 지명들을 자연스럽게 함께 떠올릴 수 있겠다.
한자로는 달 월月 자를 쓰지만, 실제 지형을 보면 산비탈의 밭, 언덕 위의 평지, 들판보다 조금 높이 올라앉은 마을인 경우가 많다.
옛 지명에서 ’달’은 산이나 높은 곳, 도드라진 지형과 연결되어 해석되기도 한다.
그래서 달밭은 반드시 달빛 드는 밭이 아니라, 높은 밭, 산비탈 밭, 산자락의 밭(달밭꿈(태백시))일 수 있다.
달전과 월전 역시 한자 표기만으로 풀 것이 아니라, 현장의 높낮이와 산줄기 흐름을 함께 살펴야 한다.
닷전도 이런 의미망 안에서 읽을 수 있다.
달이 닷으로, 닷이 닻으로 적혔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산자락이 돋아나고 들판 쪽으로 불쑥 나온 자리라는 점에서는 달·닷·돋·솟의 감각이 서로 통한다.
해가 돋고, 싹이 돋고, 봉우리가 솟듯이, 땅도 돋고 솟는다. 들판 가운데 산자락 끝이 불쑥 나오면 사람들은 그곳을 그냥 평평한 땅으로 보지 않았다. 도드라진 곳, 튀어나온 곳, 모퉁이진 곳으로 보았다.
곶도 같은 의미망으로 들어온다. 곶은 튀어나온 땅이다.
물가의 끝이나 뾰족한 산에 붙는 이름이다.
산줄기가 들판으로 뻗어 나오고, 그 끝에서 길이나 물길이 돌아가는 곳이다.
그런 자리는 사람의 눈에 강하게 잡힌다. 마을이 앉기 쉽고, 길이 생기기 쉽고, 때로는 성이 들어서기 쉽다.
잣이 산성지형의 말이라면, 곶은 돌출지형의 말이고, 솟은 높이의 말이며, 닷은 돋은 자리의 말일 수 있다.
돛과 닻도 여기에 조심스럽게 겹쳐볼 수 있다. 돛대는 위로 솟은 기둥이고, 닻은 아래로 내려가 배를 붙잡는 물건이다.
하나는 하늘로 솟고, 하나는 물밑에 박힌다. 방향은 다르지만 둘 다 끝과 돌출, 고정과 방향의 감각을 품고 있다.
지명에서 ’닻전’이라는 표기가 생겼다면, 그것은 실제 배의 닻에서 왔을 수도 있지만, 닷·잣·달·돋 계열의 소리와 형상이 후대에 익숙한 글자인 ’닻’으로 굳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물론 지명을 이야기할 때는 절대로 성급하게 하나의 정답을 고르면 안 된다.
닻전모랭이는 잣전에서 왔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닭전에서 왔다고만 결론을 낼 수도 없다.
닻에서 왔다고 보기에도 더 많은 수운 자료가 필요하다. 달밭이나 돋은 밭에서 왔다고 하려 해도 옛 표기와 주민 구술이 더 필요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마을 이름이 여러 층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첫째, 성하마을의 층이다. 홍산현 성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역사 지리적 층위다. 이때 닻전은 잣전, 곧 산성지형 앞의 마을이라는 해석을 얻는다.
둘째, 모랭이의 층이다. 산자락이 굽어 돌아가는 모퉁이 마을이라는 지형어의 층위다.
셋째, 닷전의 층이다. 산자락이 돋아나 들판으로 이어지는 밭, 혹은 달밭·달전 계열의 높은 밭이라는 가능성이다.
넷째, 장터의 층이다. 홍산장이 번성했던 곳이므로 닭전, 곧 닭시장이 있던 자리라는 생활사적 기억도 함께 살펴야 한다.
다섯째, 닻전의 층이다. 후대 사람들이 닷전이나 잣전, 닭전의 소리를 익숙한 글자와 사물인 닻으로 받아들이며 새롭게 굳힌 표기일 수 있다.
이 다섯 층은 서로를 완전히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한 마을의 이름 안에서 서로 겹치고 덧입혀졌을 가능성이 있다.
내 글을 많이 읽어보신 분들은 항상 내가 이야기 하는 부분을 기억할 것이다.
항상 지명은 자주 그렇게 살아남는다는 것.
처음에는 산성지형 앞의 모퉁이를 가리키던 말이었는데, 장터가 번성하면서 닭전의 기억을 입었을 수 있다.
또 표기 과정에서 닻전이 되었고, 사람들은 다시 그 이름을 배와 닻의 이야기로 풀었을 수 있다.
산자락의 모양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 닷전과 모랭이의 지형 감각도 함께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닻전모랭이는 한 가지 어원으로 풀기보다, 여러 기억이 쌓인 이름으로 읽는 것이 옳다.
성 아래 마을, 산모퉁이 마을, 장터 곁 마을, 돋아난 산자락의 밭마을. 이 모든 모습이 닻전모랭이라는 이름 안에 함께 들어 있다.
특히 ’잣전모랭이’의 가능성에 마음이 간다. 잣은 산성의 말이고, 모랭이는 산모퉁이의 말이다.
두 말이 만나면 홍산현 성 아래의 지형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산줄기 위에는 성이 있고, 그 앞 모퉁이에는 마을이 있다.
길은 그곳에서 돌아가고, 장은 그 아래에서 섰을 것이며, 밭은 산자락 끝을 따라 펼쳐졌을 것이다.
그 풍경이 오래된 소리 속에서 잣전, 닷전, 닭전, 닻전으로 여러 번 흔들리며 오늘까지 내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땅이름은 정답 하나를 숨겨놓은 수수께끼가 아니다. 오히려 한 장소를 살아낸 사람들의 기억이 겹겹이 눌러 붙은 지층에 가깝다.
닻전모랭이라는 이름도 그렇다. 성곽의 기억, 산줄기의 모양, 장터의 소리, 밭의 쓰임, 후대의 표기가 한데 엉켜 있다.
그래서 이 이름을 따라가다 보면 홍산의 옛 성 아래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닻 하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산성이 된 산줄기와 그 앞에 돌아앉은 마을을 본다.
들판으로 돋아난 산자락, 길이 꺾이는 모퉁이, 장터의 소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붙잡고 있는 오래된 이름 하나.
닻전모랭이.
이 이름은 홍산현 성 아래에서 땅이 스스로 내린 닻이라고 표현해도 멋지겠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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