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어지고 불룩한 땅의 이름
‘벌·볼’의 중심 의미와 ‘펀던·번덩·번데기·번대(기)’ 지명군
한반도 전역 산지 평탄면 지명의 신체 은유·방언 분화·복합 구조에 관한 통합 검토
한반도 통합 최종판 · 2026년 7월
요약
이 보고서는 한반도 전역에 널리 분포하는 펀던·펀덩·번덩·번덕·버덩·펀데기·번데기·번지·번대 계열을 핵심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번대기는 번대와의 관련성을 검토할 구술·확장형으로 함께 표시하되, 기록 지명에서는 번대형이 우세하므로 두 형태를 성급히 동일시하지 않는다. 이 지명군은 모두 동일한 역사적 어근에서 직접 갈라졌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좁은 산지 공간이 바깥으로 벌어지는 개방성, 주변보다 평평해지는 면, 산자락이나 산머리가 둥글고 완만하게 부풀어 오르는 볼록성을 공통적으로 포착한다.
특히 얼굴의 볼은 넓고 도톰하게 앞으로 나온 곡면이라는 점에서 이 지형 감각과 가깝다. 볼―볼록―불룩―부풀다―벌어지다―벌―벌판의 관계는 엄격한 어원 계보라기보다 소리와 형상이 서로 끌어당기는 형태상징적·음상징적 의미망으로 보는 것이 안전하다. ‘귓볼’은 표준어 ‘귓불’의 현대적 재해석이므로 동일 어원이라고 할 수 없지만, 도톰한 부분을 ‘볼’로 받아들이는 오늘날의 언어감각을 보여 준다.[1]
지역별로는 충청의 펀던·펀덩·번덩·번데기, 경기의 펀더지, 강원의 펀데기·버덩·번둔·번지, 전라와 경상의 번덩·번데기·버덩·평전, 북한의 번지·번데기·번대가 확인된다. 이 분포는 행정도 경계에 따라 깔끔하게 갈라지지 않으며, 한반도 산지 전반에 연속적으로 펼쳐진 뒤 지역마다 특정 형태의 밀도와 선호도가 달라지는 양상에 가깝다. 북한의 번대산·번대머리·번대수리·번번대가리산 같은 이름은 이 계열이 낮은 평야에만 붙는 것이 아니라 정상부나 능선 위가 넓고 완만한 산에도 붙었음을 보여 준다.
‘벌’은 북한만의 특색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남북 전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지명에 쓰이는 한반도 공통의 중심 지형어이자 생산적인 후부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벌을 전체 의미망의 핵심어로 두되, 개별 ‘-벌’ 지명은 지역별 변이 목록에서 분리한다. 향후에는 ‘-벌’을 공통 후부 요소로 두고 그 앞에 결합하는 전부 요소를 위치·형상·크기·식생·토질·생업·취락명의 유형으로 분석해야 한다.
| 핵심 명제 ‘벌·벌판’이 벌어지고 열린 넓은 면을 나타내는 한반도 공통의 중심어라면, 펀던·번덩·번데기·번지·번대(기)는 그 공간 감각이 산지 지형과 지역 발음에 따라 세밀하게 분화한 핵심 지형어군이다. |
주제어: 토박이 지명, 벌, 볼, 펀던, 번덩, 번데기, 번지, 번대, 벵디, 평전, 신체 지형 은유, 형태상징, 전부요소, 후부요소
차례
1. 연구 목적과 분석 원칙
2. 중심 의미망: 벌어짐·평탄함·볼록함
3. 얼굴의 볼과 신체 지형 은유
4. 토박이말과 한자 지명의 중첩
5. 지역별 방언형과 지명 사례
6. 북한의 번지·번데기·번대 계열
7. 산과 봉우리 이름에 나타나는 번대·번대기
8. 복합지명의 전부요소와 후부요소
9. 한반도 공통 중심어 ‘벌’의 위상
10. 잠정적인 음운·형태 관계
11. 어원론적 경계와 연구 방법
12. 결론
부록 1. 지역별 지명 목록
부록 2. 자료 및 참고문헌
1. 연구 목적과 분석 원칙
우리말의 전통 지명은 땅을 위에서 내려다본 추상적인 도형으로만 표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몸과 생활도구에서 얻은 감각을 바탕으로 산과 들을 읽었다. 산에는 머리·허리·등·어깨·목·턱·코·꼬리·대가리 같은 말이 붙고, 골짜기에는 품·아귀·구렁 같은 말이 붙는다. 지명은 지형의 높이와 면적뿐 아니라, 사람이 그 장소에 다가가며 느낀 열림·막힘·넓어짐·부풀어 오름을 기록한다.
이 보고서는 펀던·번덩·번데기·번지·번대·벵디·평전·벌 등의 관계를 세 층위로 나누어 본다.
| 이번 최종판의 범위 본격적인 분포·형태 분석은 펀던·펀덩·번덩·번덕·버덩·펀데기·번데기·번지·번대(기)에 집중한다. 벌·볼은 중심 의미망, 평전은 한자화층, 벵디는 비교형으로 활용한다. |
· 첫째, 실제 방언 및 지명 변이로 비교할 수 있는 형태군
· 둘째, 토박이말의 뜻이나 소리를 한자로 옮긴 평전·평촌·평대 등의 표기층
· 셋째, 벌·볼·볼록·불룩·판판·펀펀·평평·펑퍼짐이 공유하는 확장된 형태상징적 의미망
이 구분은 두 극단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는 소리가 비슷한 모든 말을 하나의 고대 어근으로 환원하는 과잉 어원론이며, 다른 하나는 지역별 지명들이 공유하는 공간 감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지나친 분절이다. 본고는 직접적인 동계 관계가 입증된 범위와, 의미와 소리의 상호 연상으로 형성된 넓은 의미망을 구별한다.
2. 중심 의미망: 벌어짐·평탄함·볼록함
이 지명군의 중심은 단순한 ‘평면’이 아니다. 다음 세 감각이 함께 작동한다.
| 감각 | 지형적 내용 | 관련 표현 |
| 벌어짐·열림 | 좁은 골짜기나 경사지가 끝나며 시야와 공간이 바깥으로 열림 | 벌어지다, 벌, 벌판 |
| 평탄함·완만함 | 주변의 급한 경사에 견주어 한결 평평하고 판판해지는 면 | 펀펀하다, 판판하다, 평평하다 |
| 볼록함·부풂 | 산자락·산어깨·산머리가 둥글고 넓게 앞으로 나오는 곡면 | 볼, 볼록하다, 불룩하다, 부풀다 |
따라서 같은 말이 저지대의 넓은 들과 산중의 작은 평탄지에 모두 붙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높이가 아니라 주변 지형에 견주어 넓고 완만한 면이 생기는가이다. ‘버덩’도 사전에서 높고 평평하며 나무가 없이 풀이 우거진 거친 들을 뜻하는 말로 풀이된다.[2] 이는 산지의 평탄면이 이 의미망의 중요한 대상임을 보여 준다.
3. 얼굴의 볼과 신체 지형 은유
배아미, 곧 뺨 앞쪽의 볼은 얼굴에서 도톰하게 나오면서도 넓고 완만한 곡면을 이룬다. 사람이 산을 몸으로 읽을 때 봉우리는 머리, 능선은 등이나 어깨, 고개는 목이 된다. 그렇다면 산허리나 산머리에서 앞쪽으로 넓게 부풀어 오른 부분은 산의 ‘볼’과 같은 자리로 인식될 수 있다.
| 형태상징의 연쇄 볼 → 볼록하다 → 불룩하다 → 부풀다 → 벌어지다 → 벌 → 벌판 |
이 연쇄를 곧바로 역사적 어원 계보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다만 둥글게 나온 형상과 넓게 열린 면을 비슷한 소리로 묶는 한국어의 감각적 조직은 충분히 논의할 수 있다. 얼굴의 볼은 옆에서 보면 볼록하고, 정면에서는 넓은 면이다. 마찬가지로 산의 번대·번데기·펀던은 옆에서 보면 완만하게 부푼 지형이고, 그 위에 서면 판판하게 열린 터일 수 있다.
‘귓볼’은 특히 흥미로운 현대적 재해석이다. 표준어는 ‘귓불’이며, 국립국어원의 역사 정보는 이를 ‘귀+불휘(뿌리)’ 계열로 설명한다.[1] 따라서 귓불을 얼굴의 볼과 같은 어원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도톰하고 늘어진 귓불을 자연스럽게 ‘귓볼’이라고 부르는 현상은 ‘볼’이 둥글고 도톰한 부분을 가리키는 형태상징적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4. 토박이말과 한자 지명의 중첩
토박이 지명은 행정지명으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한자로 번역되거나, 소리와 뜻을 함께 고려한 차용 표기를 얻었다. 이때 같은 장소에 토박이말과 한자 이름이 나란히 남기도 한다.
펀던·펀덩 ↔ 평전(平田)
한글새소식 590호의 지명 자료는 평전을 펀던의 한자 차용형으로 설명하고, 펀던·펀덩·번덩·버덩·평전이 같은 지명망 안에서 교차하는 사례를 제시한다.[3]
벌말 ↔ 평촌(坪村)
벌판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토박이 이름이 행정지명에서 평촌으로 옮겨진 경우가 많다. 이는 소리의 대응보다 뜻번역의 관계가 뚜렷하다.
벵듸·뱅디 ↔ 평대(坪代·坪岱)
제주 평대리의 토박이 이름은 벵듸·뱅디 계열로 전하며, 마을 자료에서는 평평한 둔턱 또는 너른 들을 가리키는 말로 설명한다. 평대라는 한자 표기는 이 소리와 의미를 행정지명으로 정착시킨 층위로 볼 수 있다.[4]
따라서 이 현상은 단순한 음운동화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방언형의 분화, 음차, 훈차·한역, 행정지명화, 후대의 민간어원적 재해석이 여러 시대에 걸쳐 포개진 결과이다.
5. 지역별 방언형과 지명 사례
5.1 충청권—펀던·펀덩·번덩·번덕·번데기
충청권, 특히 대전과 계룡산 주변에서는 산기슭이나 골짜기 위쪽의 평탄지를 펀던·펀덩이라 부르는 사례가 많다. 충남 서부에서는 번덩·번덕·번데기 계열이 함께 나타난다. 한글새소식의 지명 자료는 대전권에서 펀던·펀덩·번덩·버덩·평전이 촘촘하게 교차함을 보여 준다.[3]
· 대전 원신흥동 윗샘펀던
· 대전 계산동 돼지펀던
· 대전 산직동 옹기펀던
· 대전 법동 탑거리펀덩—평전·버덩이라는 이명
· 대전 낭월동 샴번덩〔샴번뎅이〕
· 충남 청양군 남양면 백금리 도둑놈잔치번데기
· 충남 청양군 남양면 백금리 뒷번데기
· 충북 진천군 이월면 펀던마을
청양 남양면의 도둑놈잔치번데기는 현지 능선의 소지명으로 전하며, 진천 펀던마을은 현재도 마을 이름과 회관 명칭에 남아 있다.[5][6] 이 분포는 펀던 계열이 일회적인 고유명사가 아니라 특정 지형을 가리키는 생산적인 지명 요소였음을 뒷받침한다.
5.2 경기권—펀더지·벌말·평촌
경기권에서는 펀더지와 벌말이 주목된다. 펀더지는 충청의 펀던과 앞부분을 공유하면서 뒤의 형식만 달라진 형태이며, 벌말과 평촌의 대응은 토박이 지명과 한자식 뜻번역을 보여 준다.
· 파주 문산 임진의 창꾹말 펀더지
· 수원 이의동 벌말
· 안양 평촌동 벌말〔평촌〕
· 광주 곤지암읍 삼리 벌말〔평촌〕
· 평택 진위면 신리 벌말
다만 벌말은 전국적으로 매우 흔한 공통 취락지명이므로, 경기만의 방언형이라기보다 경기권 사례로 이해해야 한다. 본고의 지역별 비교에서 핵심적인 경기형은 펀더지이다.
5.3 강원권—펀데기·버덩·번둔·번지·평전
강원권에서는 산지의 완만한 평탄면을 가리키는 펀데기·버덩·번둔·번지·평전 계열이 확인된다. ‘버덩’의 사전적 의미 자체가 높은 평탄지와 연결되어 있어, 강원 산지의 지명에 잘 맞는다.[2]
· 양구군 동면 원당리 펀데기·펀데기골
· 원주 구학리 남산버덩
· 원주 구학리 닭이집버덩〔닭이집번둔〕
· 원주 태장동 쑥디버덩
· 원주 반곡동 치악평전
· 태백 철암동 두둑번지
두둑번지는 지형 전체가 두둑하게 올라와 있으면서 산중턱에 평지를 이루어 ‘두둑평지’ 또는 ‘두둑번지’라 불렸다고 전한다.[7] 이는 번지가 오늘날의 주소 단위와 무관한 토박이 지형어로 쓰였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다.
5.4 전라권—번덩·번데기·번덕·평전
전라권에서는 번덩·번데기·번덕·평전 계열이 함께 확인된다. 진안문화원 지명 자료는 ‘번덕(버덩)’을 독립된 지명 분류 항목으로 두며, 백운면 백암리의 노루목번데기골을 실제 골짜기 이름으로 기록한다.[8] 이는 전라권에서 번데기형이 단순한 우연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지형 명칭으로 기능했음을 시사한다.
· 나주 문평면 학교리 앞 평전말
· 고창 아산면 반암리 앞번덩
· 지리산 세석평전
· 진안 백운면 백암리 노루목번데기골
· 진도 임회면 고정리 번데기골
· 김제·만경의 넓은 들을 가리키는 지역 표현과 벌 지명군
이 사례들은 산중의 작은 골짜기와 평탄지에서 고원성 평탄지, 대규모 저지 평야에 이르기까지 의미망이 규모를 달리하며 확장됨을 보여 준다. 그러나 번데기·번덩·평전은 경상권에도 확인되므로 전라도의 독점적 방언형으로 볼 수 없다. 전라·경상 양쪽에 걸친 남부 산지의 공통 지명층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5.5 경상권—번데기·버덩·평전
경상권에서도 전라권과 마찬가지로 번데기·버덩·평전 계열이 확인된다. 거제시 장목면 농소리의 공식 지명유래는 ‘장군 번데기’를 “작은골에 나무가 없는 버덩”으로 풀이한다. 같은 자료에 물뱅소 버덩도 기록되어 있어, 번데기와 버덩이 동일 지역의 지형어 체계 안에서 직접 맞물리는 매우 중요한 사례가 된다.[11]
· 거제시 장목면 농소리 장군 번데기—작은골에 나무가 없는 버덩
· 거제시 장목면 농소리 물뱅소 버덩
· 밀양시 단장면 평리 번데기마—산상 취락군에 속한 마을 이름
· 김천시 구성면 평밭·평전
· 밀양시 부북면 평밭·평전—산 위의 약간 평평한 곳
· 울릉군 울릉읍 사동리 중평전·안평전
· 부산진구 양정동 평전능선
밀양 단장면 자료는 번데기마가 평리에 속한 산상의 취락임을 기록하고, 인접한 고지대 마을을 산등성이가 펑퍼짐하고 넓은 들이 있는 곳으로 설명한다.[12] 김천 구성면의 평밭·평전, 밀양 부북면의 평밭·평전, 울릉 사동리의 중평전·안평전, 부산 양정동의 평전능선도 경상권에서 평전 계열이 산지의 평탄면·능선·취락에 폭넓게 쓰였음을 보여 준다.[13][14][15][16]
| 남부권 분포의 의미 번덩·번데기·버덩·평전의 분포는 영호남의 행정 경계와 일치하지 않는다. 존재 여부로 도를 나누기보다, 어떤 형태가 얼마나 조밀하게 나타나며 산중턱·산어깨·정상부·골짜기 출구 가운데 어디에 주로 붙는지를 비교해야 한다. |
5.6 제주권—벵듸·벵디·뱅디·병디
제주의 벵듸·벵디·뱅디·병디는 주변보다 넓고 평평하게 트인 들판, 특히 오름과 오름 사이 또는 중산간의 완만한 초지와 평탄지를 가리킨다. 평대리 마을 자료는 뱅듸를 평평한 둔턱 또는 너른 들로 설명하고, 평대의 옛 표기가 여러 한자 형태로 나타났음을 전한다.[4]
· 구좌읍 평대리—옛 이름 벵듸·뱅디
· 제주시 가릿뱅듸
· 한라산 중산간 숨은물벵듸〔숨은물뱅디〕
· 애월읍 상귀리 동뱅디
· 한림 지역 만뱅디
제주형은 육지의 펀던·번덩과 음운상 거리가 있으므로 직접 동계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넓고 평평하게 열린 땅’이라는 의미적 중심은 분명하여, 한반도 지형 인식의 비교 자료로 매우 중요하다.
6. 북한의 번지·번데기·번대 계열
북한 지명 자료에서 중요한 것은 ‘벌’이 아니라 번지·번데기·번대의 넓은 분포이다. 벌은 남북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생산적인 말인 반면, 번지·번데기·번대의 분포와 복합 방식은 이번 연구의 지역 변이 논점에 직접 연결된다.
6.1 번지 계열
· 함경북도 화대군 하평리 번지
· 자강도 고풍군 문덕리 번지골
· 평안북도 구성시 기룡리 번지골
· 평안북도 운전군 대연리 번지봉
· 황해남도 배천군 금성리 번지개
번지는 독립 지명으로도 쓰이고 골·봉·개와 결합한다. 번지봉은 정상부나 봉우리 어깨가 넓고 완만한 형상일 가능성이 있으며, 번지골은 골 안쪽에서 공간이 넓어지거나 평탄면을 끼고 형성된 지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형태적 추정이며 개별 지명의 유래는 원 지명사전과 지형도를 대조해야 한다.
6.2 번데기 계열
· 평안남도 북창군 신석리 번데기
· 자강도 초산군 앙토리 번데기
· 함경북도 명천군 양정리 번데기
· 자강도 초산군 장토리 번데기골
· 평안남도 맹산군 지성리 눈번데기
· 평안남도 북창군 신복리 새번데기말
· 자강도 용림군 천산리 뒤번데기
· 자강도 장강군 성장리 창번데기
번데기형은 단독으로 쓰일 뿐 아니라 골·말과 결합하고, 눈·새·뒤·창 같은 전부 요소를 받아 위치나 특징을 세분한다. 이 규칙적인 복합 방식은 누에의 번데기라는 사물명과 우연히 같은 소리일 뿐, 지명에서는 독립적인 지형어로 기능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6.3 번대 계열
· 함경남도 부전군 부전읍 번대산
· 함경남도 부전군 부전읍 번대머리
· 강원도 철원군 월암리 번대수리
· 함경북도 회령시 계상리 번대골
· 함경남도 이원군 대덕리 번번대가리산
· 주포리 번대산—제공 사진의 지명, 소속 군명은 원자료 재대조 필요
번대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산·머리·수리·대가리와 결합하는 빈도이다. 이는 번대가 저지대의 평야만을 뜻한 것이 아니라 산머리·산등성이·봉우리 위에서 넓고 완만하게 벌어진 면을 가리켰음을 보여 준다.
7. 산과 봉우리 이름에 나타나는 번대·번대기
산 이름에 번대가 많이 붙는 현상과 구술형 ‘번대기’의 가능성은 이 의미망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뾰족한 봉우리는 정상부의 면이 좁지만, 어떤 산은 꼭대기와 능선이 좌우로 넓게 이어지며 둥글고 평평한 윤곽을 만든다. 이러한 지형은 아래에서 보면 불룩하게 솟아 있으나, 위에 서면 넓고 판판한 터가 된다.
· 정상부가 평평한 산
· 능선이 넓고 완만한 산
· 산머리가 둥글고 펑퍼짐한 산
· 산등성이에 작은 고원이나 초지가 형성된 곳
· 봉우리 아래의 넓은 산어깨
· 급경사가 끝나며 넓어지는 산중턱

사진에서 산체의 상부는 날카로운 봉우리 하나로 끝나기보다 옆으로 넓게 퍼져 있다. 능선의 윤곽도 급하게 끊어지지 않고 완만하게 이어진다. 이러한 모습은 “산 위가 넓다”, “산머리가 판판하다”, “능선이 좌우로 벌어진다”는 번대의 추정 의미와 잘 맞는다. 다만 사진 한 장만으로 지명의 어원을 확정할 수는 없으므로 시각 자료는 문헌·고지도·구술자료를 보완하는 증거로 사용해야 한다.
8. 복합지명의 전부요소와 후부요소
번지·번데기·번대·펀던 계열이 보통명사적 지형어로 기능했다는 사실은 복합지명의 구조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 유형 | 결합 예 | 기능 |
| 후부 지형요소 | -골, -말, -봉, -산, -머리, -수리, -대가리, -개 | 기본 지형어가 놓인 장소의 세부 지형 또는 취락 성격을 표시 |
| 위치 전부요소 | 앞-, 뒤-, 위-, 새- | 기준 지점과의 상대 위치 또는 형성 시기를 표시 |
| 형상·환경 전부요소 | 두둑-, 눈-, 남산- | 표면 형상, 기후·식생, 인접 지형을 표시 |
| 생활·전승 전부요소 | 돼지-, 옹기-, 탑거리-, 도둑놈잔치- | 이용 방식, 생산 활동, 전설이나 사건을 표시 |
예컨대 새번데기말은 ‘새 번데기라 불리는 평탄지에 형성된 마을’, 뒤번데기는 ‘기준 취락이나 산의 뒤쪽에 있는 번데기’, 번대머리는 ‘넓고 판판한 산머리’로 구조화할 수 있다. 개별 전부 요소의 정확한 유래는 현지 전승을 확인해야 하지만, 복합 구조 자체는 이 말들이 특정 지형을 나타내는 생산적 요소였음을 보여 준다.
9. 한반도 공통 중심어 ‘벌’의 위상
‘벌’은 이 보고서에서 빼야 할 주변어가 아니라 의미망을 묶는 중심어이다. 벌에는 막힌 공간이 벌어지고, 시야가 열리고, 넓은 면이 형성된다는 감각이 집약되어 있다. 얼굴의 볼과 가장 가깝게 맞닿는 말도 벌이다. 볼이 앞으로 부풀어 넓은 곡면을 이루듯, 벌은 지형이 바깥으로 열리고 넓어진 면을 나타낸다.
다만 벌을 “북한지역의 특징”으로 배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남측과 북측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지명에 쓰이는 공통 지형어이자 매우 생산적인 후부 요소이기 때문이다. 평양벌·재령벌·연백벌만 제시하면 북한 특유의 말처럼 보이고, 김제벌·만경벌과 전국의 수많은 앞벌·뒷벌·큰벌·작은벌을 함께 싣지 않으면 분포의 균형도 맞지 않는다.
| 본고의 처리 원칙 벌은 전체 의미망의 중심어로 유지한다. 그러나 개별 ‘-벌’ 지명은 지역 방언형 사례 목록에서 제외하고, 한반도 전역의 공통 후부 요소로 별도 연구한다. |
향후의 ‘-벌’ 지명 연구에서는 후부 요소 벌 자체보다 무엇이 그 벌을 다른 벌과 구별하는지, 곧 전부 요소를 중심으로 분석해야 한다.
· 지역·취락명형: 평양벌·재령벌·연백벌·김제벌·만경벌
· 위치·방향형: 앞벌·뒷벌·웃벌·아랫벌·건너벌
· 크기·형상형: 큰벌·작은벌·긴벌·너른벌
· 식생·토질형: 갈대벌·모래벌·진벌
· 이용·생업형: 논벌·밭벌·목장벌
· 인접 지형형: 강벌·내벌·산밑벌
따라서 벌은 지역 변이형과 같은 층위에 놓기보다, 벌어짐―넓어짐―평탄함―볼록함이라는 의미망의 공통 중심이자 독립적인 후부 요소 연구의 대상으로 두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10. 잠정적인 음운·형태 관계
현재의 자료만으로 단일한 계통도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비교를 위한 잠정적 형태군은 다음과 같이 설정할 수 있다.
A. 펀던·번덩·버덩군
| 펀던―펀덩―번덩―번덕―버덩―펀뎅이 첫소리 ㅍ/ㅂ, 끝부분 -던/-덩/-덕, 비음 ㄴ/ㅇ의 지역적 차이가 나타난다. |
B. 펀데기·번데기·펀더지군
| 펀데기―번데기―펀더지 앞부분의 펀-/번-을 공유하나 뒤의 -데기/-더지는 지역별 지형어 형식으로 굳었을 가능성이 있다. |
C. 번지군
| 번지―번지골―번지봉―번지개 강원과 북한에서 산중턱이나 넓어진 지형을 나타내는 지명 요소로 확인된다. |
D. 번대·번대기군
| 번대―번대기(구술·확장형)―번대산―번대머리―번대수리―번번대가리산 특히 산정과 능선의 넓은 면에 결합한다. 현재 수집된 기록 지명은 번대형이 우세하므로 번대기는 현지 발음과 원자료를 더 확인해야 한다. |
E. 제주형
| 병디―뱅디―벵디―벵듸 음운상 육지형과 거리가 있지만 넓고 평평한 들이라는 의미가 분명하다. |
F. 한자화층
| 평전―평촌―평대 토박이말을 뜻으로 번역하거나 소리를 고려해 한자로 정착시킨 이름들이다. |
여기에서 평은 한자어 계열이며, 펀·번·벌·볼과의 소리 유사성만으로 동일 어근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오랜 언어생활 속에서 평평하다·펀펀하다·판판하다·펑퍼짐하다 같은 말이 서로 의미적으로 접근하고 지명의 재해석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11. 어원론적 경계와 연구 방법
이 지명군을 연구할 때는 “같아 보이는 것”과 “같은 어원으로 입증된 것”을 구분해야 한다.
· 비교적 직접적인 방언·지명 변이로 검토할 군: 펀던·펀덩·번덩·번덕·버덩·펀데기·번데기·펀더지·번지·번대
· 의미와 표기가 대응하는 한자 지명군: 평전·평촌·평대
· 확장된 형태상징적 의미망: 벌·벌판·볼·볼록·불룩·판판·펀펀·평평·펑퍼짐
특히 북한의 소지명 목록은 공개된 검색 자료만으로 모든 항목의 원문을 독립적으로 재확인하기 어렵다. 본고에서는 제공된 수집 목록을 형태 분석에 활용하되, 정식 학술 발표 전에는 북한 지명사전·고지도·좌표 자료를 대조할 필요가 있다. 주포리 번대산의 소속 군명도 제공 자료 사이에 차이가 있으므로 원자료 확인 전에는 단정하지 않는다. 평안남도 맹산군에 주포리가 존재한다는 행정 정보는 확인된다.[9]
후속 연구에서는 각 지명의 고도·경사도·지형 단면을 GIS로 비교하고, 토박이 화자의 구술을 수집하며, 조선지형도와 일제강점기 지지 자료에서 옛 표기를 추적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같은 이름이 붙은 장소들이 실제로 정상부 평탄면, 산어깨, 골짜기 출구, 충적지 가운데 어느 유형에 집중되는지를 계량화하면 의미 가설을 더욱 단단하게 검증할 수 있다.
12. 결론
이 지명군의 바탕에는 사람이 땅을 몸처럼 보고 만지듯 인식한 오래된 공간 감각이 있다. 좁은 골짜기가 끝나며 앞이 트이고, 산자락이 낮아지면서 넓어지고, 산중턱이나 능선 위에 판판한 터가 생긴다. 어떤 곳은 사람 얼굴의 볼처럼 둥글고 완만하게 부풀어 오른다.
벌·벌판은 이 의미망의 가장 넓고 일반적인 중심어이다. 벌은 공간이 벌어지고 열린 넓은 면을 나타내며, 볼―볼록―불룩이라는 신체 형상과도 가장 가까이 맞닿는다. 이에 비해 펀던·번덩·번데기·펀데기·펀더지·번지·번대·벵디·평전은 이 공간 감각이 지역의 발음과 산지 환경, 지명 형성 방식에 따라 세밀하게 분화한 형태들이다.
충청의 펀던·번덩·번데기, 경기의 펀더지, 강원의 펀데기·버덩·번지, 전라와 경상의 번덩·번데기·버덩·평전, 북한의 번지·번데기·번대는 서로 다른 지역어로 표현된 한반도의 공통된 지형 인식을 보여 준다. 이 형태들은 행정도 경계에 따라 단절되기보다 산줄기와 생활권을 따라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특히 번대산·번대머리·번대수리·번번대가리산과 번지봉은 이 계열이 낮은 평야가 아니라 산머리와 능선 위의 넓고 평평한 면에도 붙었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들을 하나의 원어에서 기계적으로 갈라진 말로만 볼 것이 아니라, 벌어짐―열림―넓어짐―평탄함―펀펀함―볼록함―산정의 너른 면이라는 지각적 중심을 공유하며 오랜 기간 분화한 한반도의 지형 의미망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 위에 지역별 방언 변화, 복합지명 형성, 음차와 훈차, 한자화, 행정지명화, 민간어원적 재해석이 여러 층으로 포개져 오늘날의 다양한 이름을 만들었다.
부록 1. 지역별 지명 목록
| 권역·형태 | 수집 지명 |
| 충청권 | 윗샘펀던; 돼지펀던; 옹기펀던; 탑거리펀덩; 샴번덩〔샴번뎅이〕; 도둑놈잔치번데기; 뒷번데기; 펀던마을 |
| 경기권 | 창꾹말 펀더지; 이의동 벌말; 안양 벌말〔평촌〕; 곤지암 벌말〔평촌〕; 평택 신리 벌말 |
| 강원권 | 원당리 펀데기·펀데기골; 남산버덩; 닭이집버덩〔번둔〕; 쑥디버덩; 치악평전; 두둑번지 |
| 전라권 | 평전말; 앞번덩; 세석평전; 노루목번데기골; 진도 번데기골 |
| 경상권 | 거제 장군 번데기; 거제 물뱅소 버덩; 밀양 번데기마; 김천 평밭·평전; 밀양 평밭·평전; 울릉 중평전·안평전; 부산 평전능선 |
| 제주권 | 평대리 벵듸·뱅디; 가릿뱅듸; 숨은물벵듸〔뱅디〕; 동뱅디; 만뱅디 |
| 북한 번지형 | 화대군 하평리 번지; 고풍군 문덕리 번지골; 구성시 기룡리 번지골; 운전군 대연리 번지봉; 배천군 금성리 번지개 |
| 북한 번데기형 | 북창군 신석리 번데기; 초산군 앙토리 번데기; 명천군 양정리 번데기; 초산군 장토리 번데기골; 맹산군 지성리 눈번데기; 북창군 신복리 새번데기말; 용림군 천산리 뒤번데기; 장강군 성장리 창번데기 |
| 북한 번대형 | 부전군 부전읍 번대산·번대머리; 철원군 월암리 번대수리; 회령시 계상리 번대골; 이원군 대덕리 번번대가리산; 주포리 번대산(행정 소속 재확인 필요) |
부록 2. 자료 및 참고문헌
[1]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 및 역사 정보: ‘귓불’의 표준어·어원 설명.
[2] 국어사전류의 ‘버덩’ 풀이: 높고 평평하며 나무 없이 풀이 우거진 거친 들.
[3] 한글학회, 《한글새소식》 제590호(2021.10), 펀던·펀덩·번덩·버덩·평전 계열 지명 자료.
[4] 제주 구좌읍 평대리 마을 자료: 벵듸·뱅디와 평대의 지명 유래.
[5] 충청도 지역답사 기록: 청양 남양면 백금리 도둑놈잔치번데기 등 소지명.
[6] 진천 지역자료: 이월면 펀던마을 및 펀던마을회관.
[7] 태백 지역자료: 철암동 두둑평지·두둑번지의 지명 설명.
[8] 진안문화원, 《진안의 지명》 및 지명 데이터베이스: 노루목번데기골, 번덕(버덩) 분류.
[9] 북한지역정보넷: 평안남도 맹산군 주포리 행정리 개요.
[10] 주포리 번대산 위성사진(구글어스). 북한 소지명(통일부 북한정보포털) 자료로 활용함.
[11] 거제시청, 장목면 농소리 지명유래: 장군 번데기·물뱅소 버덩. https://www.geoje.go.kr/index.geoje?menuCd=DOM_000008905007004069
[12] 밀양시 단장면 마을소개: 평리의 번데기마와 산상 취락 지형. https://www.miryang.go.kr/twn/index.do?mnNo=1060000&owd=danjang
[13] 김천시 구성면 지명유래: 평밭·평전. https://www.gc.go.kr/culture/contents.do?mId=0404031100
[14] 밀양시 부북면 마을소개: 산 위의 평밭·평전. https://www.miryang.go.kr/twn/index.do?mnNo=1060000&owd=bubuk
[15] 울릉군 울릉읍 사동리의 역사: 중평전·안평전. https://www.ulleung.go.kr/org/ulleung/page.do?mnu_uid=765
[16] 부산진구 지명유래: 양정동 평전능선. https://www.busanjin.go.kr/index.busanjin?menuCd=DOM_000000103003003000
| 자료 신뢰도 표시 남한의 핵심 사례와 의미 설명은 공개된 지역·문화·언어 자료로 교차 확인하였다. 경상권의 장군 번데기·물뱅소 버덩·번데기마·평전 사례는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지명유래 및 마을 자료로 보강하였다. 북한의 세부 소지명은 통일부의 북한정보포털의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했으며, 학술 인용 전에는 원 지명사전·고지도·좌표 자료의 재확인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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