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터무늬-지명, 땅이름 이야기

하늘 - 용, 땅 - 지렁이, 물 - 장어 - 땅이름으로 길게 투영되다.

잉화달 2026. 5. 8. 16:39

꿈틀거리는 생명력의 기록, ‘장아밭’과 ‘장어골’

신비하고도 익숙한 민물장어와 땅이름 장어골·장아밭·장아산 이야기

장어는 참 이상한 생명입니다.

우리 밥상에서는 더없이 익숙한 보양식이고, 강가 사람들에게는 오래전부터 귀한 단백질이었지만, 그 삶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신비롭기 그지없습니다.

 

물(海) - 장어

장어는 강에서 태어나 강에서 늙는 물고기가 아닙니다. 강과 바다를 오가며 삽니다. 민물에서 자라다가 어느 때가 되면 몸빛을 바꾸고 먼바다로 향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눈이 쉽게 닿지 않는 깊고 먼 바다에서 다음 생명을 남깁니다.

동아시아의 뱀장어 무리는 서마리아나 해령 부근의 먼바다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서양의 장어들은 사르가소 바다를 고향으로 삼습니다. 그러니 장어의 고향을 옛사람 식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용궁’입니다.

깊고 푸른 바다의 용궁에서 태어난 어린 장어들은 처음부터 우리가 아는 장어의 모습이 아닙니다. 댓잎처럼 얇고 투명한 댓잎장어, 곧 렙토세팔루스 시기를 거치고, 해류를 따라 긴 여행을 한 뒤 실뱀장어가 되어 강어귀와 개천으로 스며듭니다.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기묘한 생명도 드뭅니다.

흙탕물 개천에서도 살고, 돌 밑에도 숨고, 논도랑과 강어귀를 오가지만, 그 생명의 시작은 인간이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 먼바다에 있습니다. 그러니 장어는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먹거리이면서도 신령스럽고, 물고기이면서도 어딘가 뱀과 용의 기운을 함께 품은 존재였습니다.

그 생명력은 땅이름에도 스며든 듯합니다.

전남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의 산골짜기에는 ‘장어골’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옥천 이원면의 장아밭, 청양 남양면의 장아밭, 부여 은산 장벌리와 제천 백운 모정리 일대의 장어골, 그리고 인천과 진주 등지의 장아산 계열 지명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물론 이 이름들을 모두 실제 장어 서식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곳은 실제 물길과 관련되었을 수 있고, 어떤 곳은 긴 골짜기나 구불구불한 산줄기의 형상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곳은 장어가 아니라 ‘장아’, ‘장이’, ‘짱아’처럼 길고 꿈틀거리는 사물을 가리키던 생활어의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름들이 대체로 하나의 이미지를 공유한다는 점입니다.

길다.
휘어진다.
꿈틀거린다.
끊어진 듯 이어진다.
물길처럼 파고들고, 산줄기처럼 비틀리며, 생명처럼 움직인다.

장어골이라는 이름을 가진 골짜기들을 지도에서 들여다보면, 실제로 물길이 깊숙이 파고들거나 골짜기가 뱀처럼 휘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아밭 역시 단순한 밭 이름이라기보다, 길게 빠진 들판이나 물기 어린 밭, 혹은 꿈틀거리듯 굽은 지형을 가리켰을 가능성을 열어볼 수 있습니다. 장아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줄기가 장어의 등처럼 길게 뻗거나, 물결처럼 휘어지는 형상에서 이름이 생겼을 수 있습니다.

 

땅(地) - 지렁이

여기서 조심스럽게 함께 떠올려볼 말이 ‘지렁이’입니다.

지렁이는 오래전부터 지룡, 곧 ‘땅의 용’이라 불렸습니다. 디룡이, 지룡이, 지릉이, 지렝이 같은 말들이 오늘날의 지렁이와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렁이는 단순히 흙속 벌레가 아닙니다. 옛사람들의 감각 속에서는 땅속을 기어가는 작은 용, 곧 토룡이었습니다.(토룡탕 ^^;;)

반면 장어는 長魚, 곧 ‘긴 물고기’입니다. 몸이 길어 장어이고, 뱀처럼 생겨 뱀장어이며, 장아·뱀장아·뱀장이·짱어 같은 방언형도 남아 있습니다. 지렁이와 장어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는 땅의 용이고, 하나는 긴 물고기입니다.

그러나 두 생명은 같은 상상력의 이웃에 있습니다.

지렁이는 흙속에서 꿈틀거리고, 장어는 물속에서 꿈틀거립니다. 지렁이는 땅속을 지나며 흙의 숨길을 열고, 장어는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며 강과 바다를 잇습니다. 하나는 흙의 길을 내고, 하나는 물의 길을 냅니다.

이렇게 보면 장어와 지렁이는 각자의 영역에서 길을 내는 족속들입니다.

 

하늘(天) - 미르

하늘의 용은 별길을 내고, 물의 장어는 물길을 내며, 땅의 지렁이는 흙길을 냅니다. 하늘과 물과 땅, 이 세 세계에서 길을 낸다는 것은 곧 생명을 통하게 한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길게 물길을 내는 수룡 장어.
길게 땅속 길을 내는 토룡 지렁이.
길게 미리내 별들을 따라 하늘길을 내는 천룡 미르.

 

길다는 것은 단지 모양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긴 몸은 흔히 길을 냅니다.
구불구불한 몸은 막힌 곳을 돌아갑니다.
끊어진 듯 이어지는 몸짓은 새로운 흐름을 만듭니다.

장어가 물속에서 몸을 비틀며 거슬러 오르는 모습이나, 지렁이가 흙속에서 굽이치며 지나가는 모습은 모두 생명의 통로를 여는 일입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긴 골짜기와 축축한 밭, 구불구불한 산자락을 보며 장어와 지렁이 같은 생명의 꿈틀거림을 떠올렸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장어의 길, 바다에서 계곡까지 물길은 많이 끊어졌습니다.

하구언과 보, 댐과 수문은 장어가 바다로 나가고 다시 강으로 돌아오는 길을 막았습니다. 하천 오염과 서식지 훼손, 남획과 기후 변화도 장어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한때 흔하고도 신비로웠던 이 생명은 이제 점점 귀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어골과 장아밭이라는 이름은 더 애틋합니다.

그 이름들은 단순히 “장어가 살던 곳”이라는 뜻만은 아닐 것입니다. 길게 휘어지는 골짜기, 물기 어린 밭, 꿈틀거리는 산줄기, 흙과 물 사이에서 솟아나는 생명력을 바라본 옛사람들의 감각이 그 안에 남아 있습니다.

장어는 용궁에서 와서 강을 거슬렀고, 지렁이는 흙속에서 밭을 살렸습니다. 하나는 물의 생명이고, 하나는 흙의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둘은 모두 낮은 곳에서 꿈틀거리며 세상을 살렸습니다.

전남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산골짜기의 장어골을 지도에서 바라봅니다. 물길이 산속으로 파고들고, 골짜기가 몸을 비틀며 이어집니다. 그 모습이 꼭 한 마리 장어 같기도 하고, 비 온 뒤 흙 위로 올라온 지렁이 같기도 합니다.

지명은 때때로 오래된 생명의 표본입니다.

박제된 이름이 아니라, 아직도 땅속에서 꿈틀거리는 기억입니다. 장아밭과 장어골이라는 이름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끊어진 강의 길과 잊힌 흙의 숨을 다시 떠올리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에는 미리내가 있고, 물에는 장어의 길이 있으며, 땅에는 지렁이의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들은 모두 생명이 지나간 자리입니다.

 

(이렇게 삼계(三界)에 존재하는 '긴 생명체'들이 우리말과 한자가 섞이는 과정에서 '지/장/짱'이라는 비슷한 음상을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장아밭'이라는 이름에는 그 땅이 지렁이처럼 비옥하고, 장어처럼 힘차며, 용처럼 서기(瑞氣)가 서리길 바라는 마음이 중의적으로 담겨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

 

아래 사진  - 전남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산골짜기의 ‘장어골’. 산속으로 파고드는 물길과 휘어진 골짜기의 형상이 장어처럼 길고 꿈틀거리는 생명감을 떠올리게 한다.  출처: 하늘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