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터무늬-지명, 땅이름 이야기

[땅이름 산책] 산직, 마직, 범직, 산직골 산직말 범직이 대마직 등

잉화달 2026. 5. 12. 19:54

 

마을 지명을 살피다 보면 참 이상한 말들이 오래 살아남아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직’입니다.  산직, 마직, 범직.(산직말, 대마직, 범직이 등)

 

처음 들으면 조금 딱딱합니다. 무슨 관청의 직책 이름 같기도 하고, 옛날 장부에 적힌 하급 직역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장에 가서 들어보면 이 말들은 의외로 아주 생활적인 냄새를 풍깁니다.

산직은 산을 지키는 일과 닿아 있습니다.


산직이, 산직말, 산직골 같은 이름에는 산을 돌보고, 산소를 지키고, 남의 산을 함부로 베지 못하게 살피던 사람과 자리가 겹쳐 있습니다. 예전에는 산이 곧 땔감이고, 퇴비이고, 집 짓는 재료이고, 마을살이의 큰 창고였습니다. 산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나무 몇 그루를 지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을의 생계와 조상의 무덤과 집안의 체면을 함께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마직도 그렇습니다.
마직은 말과 관련된 직무, 말 돌봄, 역참, 길목의 기억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말을 매고, 먹이고, 살피고, 길 떠나는 사람과 물자를 이어주던 자리. 그러니 마직이라는 말에도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한때 그곳에서 이루어졌던 생활의 기능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범직은 어떨까요.

범직.   이 말은 더 묘합니다.  ‘호직’이 아니라 ‘범직’입니다.

한자식 말로 점잖게 정리된 이름이 아니라, 입말 그대로의 범이 살아 있습니다.

호랑이라는 관념보다, 산마을 사람들이 실제로 두려워하고 마주쳤던 그 ‘범’의 냄새가 먼저 납니다.

전국 곳곳에는 범직이, 범직골, 범직말 같은 이름들이 남아 있습니다.

공식 지명으로 오른 것도 있고, 지도에는 없지만 마을 안에서만 불리는 미시 지명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마을 어르신들의 구술을 따라가다 보면, “옛날에 범이 자주 나왔다”, “그 산 모양이 범이 엎드린 형국이다”,

“범이 마을을 지켜주는 자리다”, “범을 보려고 사람이 지키던 곳이다” 같은 이야기가 겹겹이 붙어 나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범직의 의미가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범이 마을을 지킨다는 해석입니다.
우리 민속에서 호랑이는 두려운 짐승이면서도 영물입니다.

산신의 사자이기도 하고, 마을의 액을 막아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범직은 “범 형국의 산이 마을을 지켜준다”는 풍수적 설명을 갖습니다.

이 경우 범직은 사람이 범을 지킨 자리가 아니라, 범이 마을을 지켜주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층위가 있습니다.
범을 살피고, 막고, 잡기 위해 사람이 지키던 자리였을 가능성입니다.

예전 산촌에서 호랑이는 상상 속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밤길을 막는 공포였고, 아이와 가축을 위협하는 현실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호랑이를 잡기 위한 착호군, 착호갑사, 착호인 같은 제도도 있었습니다. 국가가 호랑이 피해를 그냥 민간의 일로만 두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지방에서는 호랑이가 나타나면 사람을 동원하고, 길목을 살피고, 포획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렇다면 마을 단위에서도 당연히 비슷한 대응이 있었을 것입니다.
범이 드나드는 고개, 짐승길, 골짜기 입구, 산과 마을이 맞닿는 곳에 사람이 섰을 것입니다. 밤에 불을 피우고, 소리를 내고, 흔적을 살피고, 교대로 망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공식 문서에는 착호니 정호니 하는 말로 남았겠지만,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는 훨씬 단순하게 남았을 것입니다.

“범 보던 자리.”   /    “범 지키던 곳.” / “범직이.”

이렇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범직이라는 이름을 단순히 “호랑이 모양의 산”으로만 보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런 곳도 있습니다. 산세가 범처럼 생겨서 범직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범이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어 범직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실제로 범을 감시하고 막던 생활방어의 기억이 지명 속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산직이 산을 지키는 자리라면,
마직이 말을 살피는 자리라면,
범직은 범과 마을 사이의 경계를 지키던 자리였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직’은 단순한 직책 이름을 넘어섭니다.
‘맡아 지킨다’는 몸의 기억에 가깝습니다. 산직은 산의 지킴이고, 마직은 말의 지킴이며, 범직은 범을 둘러싼 지킴입니다. 다만 범직의 지킴은 조금 더 복잡합니다. 범을 지키는 것인지, 범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것인지, 아니면 범이 마을을 지켜준다는 것인지가 서로 뒤섞여 있습니다.

 

바로 그 복잡함이 지명의 매력입니다.

옛 사람들에게 호랑이는 죽여야 할 해수이면서, 동시에 함부로 모욕할 수 없는 산의 주인이었습니다. 무서워하면서도 받들고, 쫓아내면서도 빌었습니다. 그러니 범직이라는 이름 속에는 두려움과 공경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생활의 긴장과 민속의 상상력이 한 이름 안에서 만난 것입니다.

이런 이름들은 지도 위에서는 작고 초라합니다.
때로는 한자 표기가 엉뚱하게 붙어 본래 뜻을 가리기도 합니다. 범을 뜻하는 말이 소리만 빌려 다른 글자로 적히기도 하고, 세월이 지나면서 뜻을 모르는 이름처럼 굳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을 어르신의 입에서 그 이름이 다시 불릴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옛 장면들이 조금씩 살아납니다.

 

산을 지키던 사람.
말을 돌보던 사람.
범이 내려오는 길목을 살피던 사람.

그들이 섰던 자리가 지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명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지켰을까?”
“무엇을 두려워했고, 무엇을 신성하게 여겼을까?”
“어떤 생업과 위험과 믿음이 이 땅의 이름으로 남았을까?”

산직, 마직, 범직은 그래서 단순한 옛 지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킴의 문법입니다.
마을이 산과 말과 범을 상대하며 살아온 방식의 흔적입니다.

산직은 산을 지키고, / 마직은 말을 살피고, /  범직은 범과 마을 사이의 긴장을 지켰습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범이 수호신이었고, 어느 마을에서는 밤마다 살펴야 할 공포였습니다. 그래서 범직이라는 이름 속에는 ‘지킨다’는 말의 오래된 몸짓과, 호랑이를 두려워하면서도 신성하게 여겼던 마을 사람들의 복잡한 마음이 함께 남아 있습니다.

층위     근거와 의미
풍수형 범이 마을을 지킨다 연기군 고정리 범직이는 “엎드린 호랑이가 마을을 지켜주는 형국”으로 설명됨.
형국형 산이 범처럼 보인다 안산 원시동 범직이는 산 형국이 호랑이처럼 동쪽을 바라본다는 설명이 있음.
범을 살피고 막던 자리 착호군·착호인처럼 호랑이 피해에 대응한 공식·지방 조직이 있었음.
직무형 /직이 = 지키는 사람·자리 산직, 마직처럼 특정 대상을 맡아 지키거나 관리하는 말의 계열에 놓을 수 있음.
구술형 범 지킴이 → 범직이 청양 온직리 사례처럼 “범 지킴이”가범직이”로 굳었다는 전승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