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와 조치원, 그리고 원마루의 기억
조치원이라는 지명에는 몇 가지 유래설이 전해진다. 대표적으로는 고운 최치원과 관련한 설이 있다. 최치원이 이곳에 와서 상업을 장려하고 저자를 열었다 하여, 그의 이름과 비슷한 소리로 조치원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조치원의 유래설 가운데 하나로 이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또 하나는 조선 세종 때 연기현감 허만석이 제방을 쌓은 일과 관련된다. 기록에는 이 제방이 저치제언, 또는 모치제언으로 나타난다.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에 따르면 허만석은 1427년, 곧 세종 9년 무렵 연기현감으로 부임하여 연기현 치소 북쪽 15리 지점에 큰 제방을 쌓고 물길을 잡았다. 이후 이 일대의 저지대가 농토로 바뀌면서 백성들이 허만석을 오래 칭송했다고 한다. 또 『1872년 지방지도』 「연기현지도」에는 저치제언(苧峙堤堰)으로 표기된 곳이 확인된다고 한다.
이런 기록을 보면, 조치원이라는 이름을 단순히 한 사람의 이름이나 일제강점기 철도역명에서만 찾기보다는, 훨씬 오래된 물길과 들판, 제방과 길목의 기억 속에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조천을 보자. 오늘날 조천은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에서 발원하여 조치원읍 번암리 부근에서 미호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은 조천의 이칭을 ‘새내’로 적고, 갈대와 억새풀이 무성하여 새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에서 새내라 불렸고, 이를 한자로 조천(鳥川)이라 적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저는 이 ‘새내’를 조금 더 지형어의 눈으로도 읽어볼 수 있다고 본다. 큰 강 옆으로 작은 물길이 가지처럼 흘러 들어가는 경우, 예전 사람들은 이를 샛강, 새내, 가지내, 아지내 같은 말로 불렀다. 큰 물길에 견주어 작은 물길, 본류 옆으로 난 곁물길이라는 뜻이다. 미호천을 큰 물길로 놓고 보면, 조천은 그 옆으로 흘러드는 가지 물길이다. 그러니 이 하천이 ‘새내’로 불린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청주 쪽에는 비슷한 물길 이름으로 가지내, 그리고 그 발음이 세어지며 까치내로 굳어진 사례가 있다. 조치원 쪽에서는 그 말이 새내로 남고, 한자 표기 과정에서 조천(鳥川)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새 조(鳥)는 실제 새가 많은 하천이라는 설명과도 맞지만, 동시에 ‘새내’라는 토박이 지명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선택된 글자로도 볼 수 있다. 곧 조천은 ‘새가 많은 내’이면서, 더 깊이 들어가면 ‘큰 강 곁의 작은 가지내’라는 지형 감각을 함께 품은 이름일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예전에 이 물길을 생졸천으로 불렀다는 기록 또는 전승도 흥미롭다. 생, 새, 졸, 솔, 줄 같은 소리는 모두 작고 가늘고 좁은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생쥐의 ‘생’이 작다는 느낌을 주고, 졸부추의 ‘졸’이나 솔잎의 ‘솔’도 가늘고 촘촘한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가지내의 ‘가지’나 ‘아지’ 역시 큰 줄기에서 갈라진 작은 갈래를 가리키는 말로 읽을 수 있다. 이런 계열로 보면 생졸천은 ‘작고 가는 가지 물길’이라는 뜻의 토박이 물길 이름이 한자 표기를 거치며 남은 흔적으로 조심스럽게 해석해볼 수 있다.
물론 이런 풀이는 정설로 단정할 일은 아니다. 다만 현장의 지형과 옛말의 감각을 함께 놓고 보면, 조천·새내·가지내·생졸천은 서로 전혀 다른 이름이라기보다, 큰 물길 곁의 작고 가는 물길을 두고 시대와 표기 방식에 따라 달리 적고 달리 부른 이름들로 볼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조치원은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조치원은 대체로 ‘조치’와 ‘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뒤의 ‘원’은 역원제의 원, 곧 길손과 관리들이 묵어가던 숙박시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실제로 조치원 일대에는 원마루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이름 그대로라면 ‘원이 있던 마루’, 또는 ‘원과 관련된 언덕배기’라는 뜻이다.
앞의 ‘조치’는 조금 조심스럽게 보아야 한다. 한자로 그대로 보면 鳥致院, 곧 ‘새 조’와 ‘이를 치’를 쓴다. 글자 뜻만 억지로 풀면 “새가 이르는 원”처럼 되지만, 지명에서는 한자의 뜻보다 먼저 토박이말과 지형을 보아야 한다. 이 일대의 대표 물길이 새내, 곧 조천이었다면, ‘조치’는 새내에 이르는 지점, 또는 새내 쪽으로 넘어가고 내려서는 고갯마루의 의미로 읽어볼 수 있다.
특히 옛길의 감각으로 보면 더욱 그렇다. 한양이나 개경 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던 길이 청주와 공주, 더 멀리 삼남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새내를 만나게 된다. 그 새내의 북서쪽 고갯마루 부근에 원이 있었고, 그 주변이 원마루로 불렸다면, 조치원은 “새내에 이르는 마루의 원”, 또는 “조천 길목의 원”이라는 식으로 풀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순서도 자연스럽다. 먼저 큰 강 곁의 작은 가지 물길이 있었고, 그 물길은 새내 또는 조천으로 불렸다. 그 새내를 건너거나 그쪽으로 내려서는 길목에 원이 생겼다. 원이 있으면 사람이 묵고, 말과 짐이 쉬고, 물산이 오간다. 그러면 그 아래에는 장이 서기 쉽다.
실제로 조치원장은 이미 1770년 『동국문헌비고』 향시편에 청주목 조치원장이 4일과 9일에 열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치원전통시장이 이 기록을 근거로 250년 역사를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로 보아 조치원이라는 이름과 장시의 기능은 적어도 18세기에는 이미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이후 1905년 경부선 조치원역이 영업을 시작하면서 조치원은 다시 한 번 크게 성장한다.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은 조치원역이 1905년 1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고, 이후 충북선의 기점이 되면서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고 정리한다. 철도는 기존의 원과 장시가 갖고 있던 길목 기능을 근대적으로 증폭시켰다. 예전에는 말과 사람이 쉬어가던 곳이었다면, 근대 이후에는 기차와 물산, 시장과 상권이 모여드는 곳이 된 것이다.
그래서 조치원은 단순한 읍내가 아니라 ‘시내’처럼 인식되었는지도 모른다. 연기현의 전통적 치소나 동진나루 일대보다도, 철도역과 시장을 중심으로 한 조치원 시가지가 훨씬 크고 활기 있는 생활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조천은 새내다. 새내는 미호천 곁으로 흘러드는 작은 가지 물길이다. 새가 많은 냇가라는 뜻도 품었지만, 동시에 큰 강 옆의 작은 곁물길이라는 지형 감각도 함께 읽을 수 있다.
조치원은 새내, 곧 조천에 이르는 길목의 원으로 볼 수 있다. 조천 주변의 고갯마루 또는 언덕배기에 원이 있었고, 그 기억이 원마루라는 지명으로 남았다. 그 원 아래에 장이 서고, 그 장은 18세기 문헌에도 확인된다. 그리고 1905년 경부선 역이 들어서며 조치원은 근대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확장되었다.
그러므로 조치원이라는 이름은 한 사람의 전설이나 한자 몇 글자의 뜻풀이만으로 닫아버릴 수 없다. 그 안에는 미호천 곁의 작은 새내, 조천의 제방과 저습지, 길목의 원, 장시의 번성, 그리고 철도 이후 시가지로 커져간 시간이 겹겹이 들어 있다.
결국 조치원은 이렇게 읽어볼 수 있겠다.
1)조천은 새내, 곧 큰 물길 곁의 가지내다.
3)조치원은 그 새내에 이르는 마루(고개)의 원이다.
그리고 오늘의 조치원은 그 원과 장, 철도가 차례로 쌓아 올린 길목의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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