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달 하나
(마을의 터주들에게)
소나무는
낙엽과 다투지 않고
모두가 앙상한 나목으로 겨울을 날 때
눈 속에 초록의 징검다리 놓아
겨울을 건너간다
사철 푸르다는 말보다
묻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어준 시간으로
기억된다
해는 시간의 경계를 긋는다.
모든 그림자에게 방향을 주고
시간을 또렷이 나눈다
달은 다만
그 질서를 흔들지 않는다
낮에도 사라지지 않은 채
빌려 쓴 빛으로
해가 지나온 자리를 지켜본다
철새는
선명한 계절을 따라 떠나지만
텃새는
때로 찾아오는 꽃샘추위와 태풍을 견디며
이곳의 시간을 남긴다
낮달 둘
마을의 골목길 삶들은
밤과 낮의 주인이 아니고
계절의 표지도 아니어서
기억의 중심에 서지 못했지만
비가 오면
먼저 길을 살피고
눈이 오면
먼저 새벽을 밟아주던 사람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누군가 돌아올 길을 남겨주던 존재들
스스로 빛나지 않아도
곁에 남아
사라지지 않음으로
마을을 지켜온 이들
낙엽이 모두 떠난 뒤에도
푸르름으로 남는 소나무처럼
해가 따갑게 내리는 대낮에도
조용히 떠 있어
이곳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음을
알려주던 반달처럼
낮달 셋(마무리)
천오백 년,
도읍의 흥망이 켜켜이 쌓인
흙더미 아래에서
이곳을 떠받친 것은
기록되지 않은 골목의 삶들이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자리를 비우지 않음으로
집을 지키고
길을 남기고
마을을 버텨낸 이들
해가 지나가도
낮에도 사라지지 않던
그 조용한 얼굴들로 인해
공주는
오늘까지 무너지지 않았다
— 대낮의 반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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