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나무의 ‘바’와 대갈통의 ‘박’
― ‘통’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직선과 둥근 형상
괴산군 청안면 조천리의 바나니골을 들여다보다가 일이 제법 커졌다. 약 600m에 걸쳐 산비탈을 대각선으로 곧게 가르는 골짜기의 모습에서 밧줄의 바, 곧게 뻗은 재목을 가리키던 바·버, 대들보의 보가 떠올랐다.
그러다 바퀴의 옛말인 바회, 쳇바퀴와 쳇박, 박과 바가지, 마빡과 대갈빡, 함지박과 함박골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바나니골 하나를 따라 들어갔는데 골 안에서 보론이 네 갈래로 뻗은 셈이다.
그 가운데 이번 글에서는 ‘통’이 어떻게 바와 박 사이를 이어 주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물론 이것은 이미 확정된 국어학적 어원설이 아니다. 생활어와 사물의 구조, 인체와 지형의 닮은꼴을 함께 놓고 살펴보는 하나의 의미망 가설이다.
길고 곧은 통나무의 ‘바·버’
충청도와 경남 일부 지역에서는 곧게 뻗은 통나무나 재목을 가리키는 말과 관련하여 바·버 계열의 생활어가 널리 쓰였다.
산에서 잘라 놓은 남의 재목을 가져갈 수는 없으니, 그 재목에서 벗겨진 나무껍질을 주워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것을 지역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불렀다.
버껍데기
버급데기
바겁데기
여기서 ‘버’를 단순히 껍질의 바깥이라는 뜻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껍질을 두르고 있던 길고 둥근 재목의 몸체, 곧 통나무 자체를 가리키던 말일 가능성이 있다.
밧줄의 바도 길고 이어진 선형의 사물이다. 대들보의 보 역시 굵고 긴 재목을 가로질러 놓은 구조물이다.
이들을 곧바로 동일한 어원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전통생활 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공통 형상으로 만난다.
길다. 곧다. 하나의 몸체로 이어진다. 무언가를 묶거나 받치거나 가로지른다.
바나니골과 바곡, 진바곡 같은 지명도 이러한 생활어의 형상을 산속에서 다시 발견한 이름일 수 있다.
바나니골의 ‘바’는 산속에 길게 놓인 밧줄이거나, 비스듬히 눕혀 놓은 곧은 재목처럼 보인다.
그런데 통나무의 ‘통’은 곧기만 한가
통나무는 옆에서 보면 길고 곧다. 그러나 가로로 잘라 보면 둥글다.
여기서 ‘통’이 흥미로운 매개어가 된다.
통나무는 길고 곧은 하나의 몸체이고,
대갈통은 둥글고 단단한 머리 전체이며,
물통·밥통은 둘레와 내부 공간을 가진 용기이다.
‘통’에는 단순히 길다는 뜻도, 단순히 둥글다는 뜻도 들어 있지 않다. 더 근본적으로는 끊어지지 않은 하나의 온전한 몸체, 그리고 겉과 속을 함께 가진 입체적인 공간이라는 감각이 담겨 있다.
그래서 통은 바·버와 박·빡 사이를 이어 준다.
바·버는 통의 길이와 직선성을 드러내고,
박·빡은 통의 둥근 몸체와 불룩한 외형을 드러낸다.
같은 통체를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형상이 강조되는 것이다.
대갈통과 대갈빡
사람의 머리를 속되게 대갈통이라고도 하고 대갈빡이라고도 한다.
두 말은 사실상 같은 신체 공간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말이 포착하는 형상의 결은 조금 다르다.
대갈통은 머리 전체를 하나의 둥근 몸체 또는 그릇처럼 본다. 머리뼈의 겉과 그 안에 든 것을 함께 묶어 하나의 ‘통’으로 인식한 말이다.
반면 대갈빡·마빡의 ‘빡’은 둥글고 단단하게 불거진 형상을 더 강하게 드러낸다. 특히 마빡은 머리 앞쪽의 둥근 곡면이 밖으로 드러난 자리이다.
따라서 ‘통’과 ‘박·빡’은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포착한다.
통은 속을 품은 전체 몸체를,
박·빡은 그 몸체의 둥글고 불거진 형상을 강조한다.
이 관계는 인체에만 머물지 않는다.
박·수박·호박과 함지박
박은 자연이 만들어 놓은 대표적인 둥근 통체이다.
박·수박·호박·새박덩굴의 명칭이 모두 하나의 어원에서 출발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생활인의 형상 인식에서는 이들이 모두 둥글게 맺히고 속을 품은 열매라는 공통점으로 묶인다.
박 열매는 밖에서 보면 볼록하다. 그러나 반으로 가르고 속을 파내면 오목한 바가지가 된다.
하나의 박 안에 두 형상이 함께 존재한다.
밖에서 보면 둥글게 불거진 덩이이고,
안에서 보면 무언가를 담는 오목한 공간이다.
이 형상이 바가지와 함지박으로 옮겨진다.
함지박은 둥근 둘레와 넓은 내부를 가진 생활도구이다. 엎어 놓으면 둥글게 솟은 산처럼 보이고, 바로 놓으면 산줄기에 둘러싸인 골짜기나 분지처럼 보인다.
그래서 함박산과 함박바위 같은 이름은 볼록한 형상을, 함박골과 함박마을은 둥글게 둘러싸여 안쪽을 품은 공간을 가리킬 수 있다.
‘통’을 통해 만나는 바와 박
이제 바·버와 박·빡을 ‘통’을 사이에 놓고 보면 관계가 조금 더 선명해진다.
통나무를 옆에서 보면
길고 곧은 몸체
→ 바·버·보
→ 밧줄, 재목, 대들보
→ 바나니골·바곡·진바곡
통나무를 가로로 자르면
둥근 단면과 외피
→ 박·바퀴의 둥근 형상과 만남
→ 둥근 테와 몸체
사람의 머리를 전체로 보면
대갈통
→ 내부를 품은 둥근 몸체
둥글고 단단한 외형을 강조하면
대갈빡·마빡
→ 불룩하게 드러난 곡면
식물의 열매에서는
박·수박·호박
→ 둥글게 맺히고 속을 품은 통체
생활도구와 지형에서는
함지박·쳇박·함박골
→ 둥근 둘레와 오목한 내부 공간
결국 바와 박은 서로 완전히 동떨어진 형상이라기보다, 같은 통체가 가진 두 방향의 모습일 수 있다.
바·버는 길게 뻗은 통이고,
박·빡은 둥글게 맺힌 통이다.
직선과 원형은 생활기술 속에서 만난다
직선의 바와 둥근 박은 전통 도구 제작 과정에서 계속 교차한다.
곧은 나무판을 휘어 둥근 쳇바퀴를 만든다. 같은 체의 몸체를 일상적으로 쳇박이라고도 한다. 긴 살대나 바를 엮으면 둥근 바구니가 되고, 통나무나 판재를 둥글게 가공하면 바퀴 본체가 된다.
반대로 둥근 박을 반으로 가르고 속을 파내면 바가지라는 생활도구가 된다.
곧은 재료가 둥근 구조를 만들고,
둥근 자연물이 다시 생활용기가 된다.
이 과정에서 바와 박, 통과 바퀴의 의미가 서로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어느 말이 어느 말보다 먼저 발생했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발생순서가 아니라 공간적 층위의 왕복이다.
인체 ↔ 식물 ↔ 생활도구 ↔ 건축물 ↔ 지형
같은 형상은 공간의 크기와 대상만 바꾸며 끊임없이 반복된다. 사람은 자기 머리를 통해 산을 이해하고, 박 열매와 함지박을 통해 골짜기를 바라보며, 통나무와 밧줄을 통해 길고 곧은 산골을 이름 붙인다.
각 층위의 말과 사물은 서로의 의미를 보충한다.
바나니골에서 함박골까지
바나니골과 함박골은 서로 반대되는 지형처럼 보인다.
바나니골은 밧줄이나 재목처럼 길고 곧게 뻗었다. 함박골은 함지박처럼 둥글게 둘러싸여 안쪽을 품는다.
그러나 두 지명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생활도구, 식물과 재목의 형상을 산천에 겹쳐 보았다.
바나니골의 ‘바’는 산속에 놓인 곧은 통나무이고,
함박골의 ‘박’은 산속에 놓인 둥근 그릇이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통’이 있다.
통은 길고 곧은 통나무이면서, 둥근 대갈통이고, 속을 품은 물통이다. 직선과 원형, 외면과 내부, 재목과 용기를 함께 품는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바·버’가 길게 뻗은 통이라면, ‘박·빡’은 둥글게 맺힌 통이다. ‘통’은 직선의 바와 둥근 박이 만나는 몸체의 말이다.
바나니골 하나를 따라 들어갔다가 대갈통과 수박, 함지박과 함박골까지 오게 되었다. 지명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면, 산속 골짜기가 사람의 몸과 생활도구, 식물과 언어의 기억을 모두 품고 있다는 사실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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